
'미안해.'
미사여구 하나 없이 그저 세 글자로 이뤄진 말일뿐인데, 만 개의 가시가 되어 가슴을 후벼판다. 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맞닥뜨리기 싫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단번에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 생각 외로는 많을 수도 있겠다만, 저는 아직 자신이 없고 아직은 완전한 어른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 얼굴에는 전혀 미안함과는 거리가 먼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 저를 보고 있었다. 계절과는 맞지 않게 온기를 머금고 있는 레몬티를 괜히 어루만지며 입을 꾹 다물어본다. 그리고 끊겨버린 장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깜빡이는 눈이 퍽이나 뻑뻑했다.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제 마음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벌써 세 번째다. 같은 내용의 꿈을 반복해서 꾼다는 건,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고 TV에선가 우연히 들었던 것 같은데, 알게 모르게 실연이라는 것은 이십 대 후반을 달리고 있는 석민에게 중대사라면 중대사였다. 미뤘던 연차와 월차는 다 쓴지 오래였고, 다시 일상으로 뛰어든다 해도 손에 무엇인가 잡힐 리가 만무했다. 실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심플하게 꾸며진 석민의 집은 마시다 만 생수라든지, 아이스 라테를 마시다 남겨 얼음이 녹아 흙탕물 색을 하고 있는 테이크아웃 잔이라든지, 고작 어지럽혔다 해도 그게 전부였다. 석민은 여름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뱉은 숨의 끝에 달려 공기를 짓누르는 습한 더위, 있던 의욕도 앗아가는 무기력한 장마, 귀찮은 날벌레 등. 여름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 색채가 예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는 여름이 참 투명하고 청량한 계절로 묘사하고는 하는데, 역시 로망에 불과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습한 공기를 떨쳐내려 내내 켠 에어컨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석민은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반복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좀, 걸어야겠어.
찰나에 한 결심은 이내 굳어지고, 누군가 일으켜 세우기라도 한 듯 힘없이 일어난 석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얇은 가디건을 하나 걸친 채 집 밖을 나섰다. 아까는 분명 흐렸던 것 같은데 지하철역까지 걷고 나서야 비가 오고 있음을 알았다. 실시간으로 날씨를 알려주는 어플 알림 덕인지 폰이 띠링, 띠링 하고 울렸다.
나의 여름에게
김민규 이석민
나인
투둑, 투두둑.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빗줄기가 생각보다 굵직하다. 녹음이 짙은 계절이 오기 직전, 촉촉하다 못해 축축이 젖어가는 유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운지라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 집 밖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석민은 지하철역 인근 편의점에서 급하게 투명 우산을 하나 사들고 우산을 쓴 채로 도심의 한복판을 유유히 지났다. 무심하게 두 귀에 꽂은 이어폰 사이에서는 단조로운 피아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클래식한 노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비가 오니 괜히 차분해지고 싶어서였다.
한복판을 지나 한참을 걷던 석민은 간판 없는 낡은 책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끔 생각을 잠재우고 싶을 때 종종 들렀던 곳인데, 오늘따라 낯선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우산을 접고 책방 안으로 들어서자 꿉꿉한 냄새가 은근히 났다. 비가 와서 습해진 탓이겠지. 협소한 책장 사이를 걷다 책장 구석으로 다다른 순간, 석민은 저도 모르게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는 거리를 보는 건지, 그저 생각에 잠긴 건지. 미묘한 표정으로 검은색 헤드폰을 쓴 채 소리 내지 않고 입을 중얼거린다. 그 사람의 오른손에는 작은 시집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제목이 인상 깊어 뇌리에 스쳤던 것 같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들은 얼마나 무수할까. 따지고 보면 모든 상황에 부합한다. 석민은 다시 시선을 돌려 책장 쪽의 책 제목들을 훑었다. 의식하지 않아 몰랐지만, 시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산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툭. 투둑. 시집 하나를 고른 석민은 창가 너머로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의 옆에 서서 똑같이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꽂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소음이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어쩌면 마음속의 소음을 억지로 잠재우려 하지 않았을까.
석민의 귀를 타고 흐르던 피아노곡의 선율은 이윽고 정점에 치닫았다. 크레센도가 길게 표시되어 있는 구간이라도 되는 건지 음의 세기는 점점 파장을 넓게 잡아 커졌다. 마치 지금의 제 상황에 자체적 백그라운드 사운드라도 달아놓은 요량인지, 멍하니 밖을 보고 있던 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제 쪽을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본 걸까, 아니면 제 행동이 신경이라도 쓰이게 한 건가.
“저기,”
“… 아, 죄송해요.”
역시나 신경을 쓰이게 한 건가. 석민은 안절부절 못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죄송함을 표했다. 제 대답이 동문서답이었던 듯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펴 석민을 가리키고는 덩달아 당황스런 기색을 표하며 한동안 감돌던 정적을 깨며 말했다.
“지금, 그쪽."
"네?"
“울고 있어요.”
“… 아?”
석민은 자각하지 못했다. 잠깐 시야가 흐려지긴 했지만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가끔 집중을 하거나 피로함이 크면 잘 보이던 것도 흐릿하게 보여서 그런 줄만 알았다. 눈물이 흐르고 지나가 볼이 축축했다. 석민은 멍한 표정으로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큰 얘기를 들은 것도 아닌데, 물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건가, 아니면 생각 외로 이 사람에게서 다정함을 느껴서 그런 걸까. 석민은 시집을 떨어트리고는 두 손을 얼굴에 묻고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억누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사람은 등을 토닥이거나 달리 어떠한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석민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모든 걸 아는 사람처럼,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것이 수백 마디의 위로보다, 열 번의 토닥임보다 더한 따듯한 위로였다.
책방을 나서서 색과 투명도가 다른 우산이 두 개가 펴졌다. 어쩌다 보니 낯선 사람 앞에서 울어버린 꼴이었으니, 석민은 얼굴이 화끈거릴 따름이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라 생각하고 그냥 도망칠까 하려다, 말없이 우는 모습을 한동안 봐주었으니 그 자리에서 잽싸게 도망가는 건 또 예의가 아니라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했기에 같이 걷자고 했다. 걸으면 일단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그 사람의 눈을 보지 않아도 되니 어색함은 좀 덜하겠지. 뭣도 모르던 대학생 땐 정말 모르는 사람한테 말도 걸고 몇 시간 만에 금방 친해지고는 했는데 이제는 낯선 상대와 몇 마디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덜컥 겁부터 난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너무 찌들어서일까.
그 사람도 해소할 거리가 없었던 걸까, 석민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와 넓은 도심의 한복판을 하릴없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비가 듣기 좋은 데시벨로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적이 감돌아도 빗소리로 소리가 가득할 뿐이었다. 비 내리는 거리를 차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저 그런 소음으로 무마되었다.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이제까지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렇게. 비에 옷깃이 젖듯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석민에게 자연히 스며들었다. 사실 마주했을 때부터 댄디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이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앳된 모습이 얼굴 곳곳에 남아있는 걸 보면 아직은 대학생인가. 아니,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석민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냥 스쳐갈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언저리에 흐릿한 잔상이 쌓고 쌓여 점차 선명해지는.
두 사람은 습한 더위를 피할 겸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은 건 나눈 말과 감정의 교감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이겠지. 석민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동안 남자는 석민에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
"이름을 여태 안 물었네. 그렇게 열심히 대화해 놓고요, 맞죠."
거리를 걸으면서 나눈 대화의 포커스가 석민에게 맞춰져 있었던지라,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많이 듣지 못했다. 아차 싶어 석민은 머쓱한 기색을 보이며 버릇처럼 턱 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이석민이요."
"… 아."
"… 하하, 되게 어색하다."
어색한 기류가 둘 사이를 감돌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냅킨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민규는 그런 석민의 반응을 살피고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석민은 갈증이 들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스트로우로 휘휘 저었고, 그로 인해 얼음이 유리컵과 마찰해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름이라는 걸 몸소 실감하는 사실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냉방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땀이 난다는 것과 오랜 시간 방치하지 않았음에도 얼음이 금방 녹는다는 것.
"김민규요."
"… 네?"
"제 이름이요. 민규."
찰나였지만, 제 나이답게 처음으로 말갛게 웃어보이는 민규를 보며 석민은 직감했다. 어쩌면, 이번 여름은 길지도 모르겠다고.
+ + +
그날 이후, 민규와 석민은 비가 오는 날만 되면 책방에서 만났다. 연락처를 따로 교환하기는 했으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번 비오는 날이면 책방에서 만났다. 민규는 대학생이었고, 종강하고 방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큰 계획을 세우지 않아 하릴없이 걷다가 그 책방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그 책방은 이상하게 자꾸 오고 싶어졌다고. 석민은 민규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그와 있으면 내가 편안해진다. 달리 마음을 재단하지 않아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거창하다 볼 수 없지만 그런 것에서부터 얼마나 많은 피로감이 감해지는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생각이 비슷한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니. 마음에 자석이라도 달린 건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질질 끌리는 기분이 들었다.
민규와 석민은 정해져 있는 코스처럼 책방을 들렀다 자연히 근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민규는 가방에서 시집을 하나 꺼내 책상에 놓았고, 석민은 책상 위에 놓인 시집 사이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가 흘어나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손으로 집었다. 여름, 해질녘의 늦은 오후의 하늘을 가득 담은 붉은 하늘을 담은 바다였다. 석민은 그 사진을 한동안 멀뚱히 보더니 다시 시집에 끼워넣으며 말했다.
"여름 좋아하나 봐요?"
"네. 바다를 좋아해요. 이 사진 속의 시간대도 좋고."
"노을 예쁘네요."
"예쁘죠."
말하는 민규의 입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지면서도 그 시선은 온전히 석민을 향했다. 마치 석민에게 말하는 듯한.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든 석민은 버릇처럼 붉어지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여름날의 오후는 길지만 그럼에도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 아쉽더라고요. 금방이라도 이 계절이 지날 것만 같고, 유유하지 않고 급하게 시간이 달음박질을 할까 봐 겁이 난다고. 석민은 편안하고 다정한 투로 말하는 민규의 모습을 보며 정말 여름을 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유리컵에 담긴 얼음이 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날 동안 민규와 석민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멍하니 차창 밖을 응시하기도 했으며, 갖고 있는 책을 바꿔서 읽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놓치고 살았던 일상의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손에 쥔 기분이 들어 석민은 순간적으로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굳이 행복을 큰 것에서부터 찾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는지, 그 대상 자체만으로 행복의 일련이 될 수 있다. 차창 밖에서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쨍한 햇빛이 석민의 얼굴선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 현기증이 났다. 석민은 손으로 햇빛을 가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빛은 강렬했고, 석민은 약했다. 민규가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을 묻자, 석민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계절은 결국 지나갈 테니까."
민규의 눈을을 바라보며 말하는 석민의 눈에서 바다가 보였다. 민규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사진 속 바다가, 생각 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도 같아서.
+
다시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바람에 근방에 있는 민규의 집에서 잠깐 비를 피하기로 했다. 민규와 석민이 민규의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옷이 반쯤 다 젖어버릴 정도였다. 비도 오고 출출하고 해서 간단히 해 먹을 것을 내온다며 부엌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석민은 소파에 앉아 항상 그랬듯이 차창 밖을 응시했다.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일을 하다가도 눈을 쉬어준다면서 몇 번이고 도심 속 풍경을 넋을 잃고 몇 분이고 보았다. 관계는 끊어졌다 하더라도, 일상 속에 밴 잔재들은 여전하다. 비 내리는 소리가 퍽이나 듣기가 좋았다.
요리를 잘 하는 편인지 민규는 금방 뚝딱 만들어 상을 차렸다. 메뉴는 볶음밥이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요리는 아니라며 얼굴을 붉히는 민규였지만, 석민은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혼자 살면서도 서투르지 않은 모습이 저보다 더 어른스럽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민규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석민은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적어도 이렇게 감정에 휘둘려 방황하진 않을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그 때 왜 울었어요?"
민규가 말하는 '그 때'는 아마 처음 만난 날을 말하는 것 같았다. 울고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그저 멍하니 민규의 모습만 보던 그 날의 석민은 아무리 곱씹어도 그 때 왜 울었는지 아직도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던 석민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평소와는 다른 눈매로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들고 있던 시집의 제목이 눈에 박혔거든요.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아아."
영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피부로 느껴보니 너무 막연한 단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무한한 궤도를 달리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민규에게 털어놓는 동안 석민의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자리 잡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민규는 흥미로운 듯 음식을 씹다가 이내 숟가락을 놓고는 석민의 말을 한동안 경청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주는 추억이라는 무게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을 때 홀로 서는 방법을 몰라서, 그게 무서워서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는 석민의 말이 조금 아프게 들리기도 했다.
"오랜만에 웃어봤어요."
감각이라는 걸 잊고 살았던 수개월 동안, 석민은 민규를 처음 만나는 날 울었고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했다. 입이 찢어지도록 웃은 건 또 간만이라서, 웃으면서도 얼떨떨한 적이 빈번했다. 그러다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석민을 보며 민규는 상을 옆으로 살짝 밀고는 품에 안았다. 단순히 연민에서 비롯된 슬픔이 아니었다. 얼마나 속에서 많이 곪았을까, 얼마나 억눌렀을까. 한동안 석민을 말없이 안아주던 민규는 양 어깨를 아프지 않게 잡아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석민 씨, 아무래도."
"…."
"올 여름은 좀 길 것 같네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라는 말은 꾹 삼킨 채. 민규는 그 사진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바다는 가까이 있었고 여름은 지나가지 않을 것이며, 가능할 것 같은 영원이었기 때문에. 얼떨떨해하는 석민을 다시 품에 안은 민규는 생각했다.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고.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이장욱 시집, 16.06.24 출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