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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31일 밤에 민규와 석민은 거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캔을 비웠다. 거실 한 구석에는 반나절 동안의 정성어린 A/S로 겨우 정신을 차린 5살짜리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 했다면 이 열대야를 선풍기 두 대 만으로 버틸 뻔 했다. 모양 빠지는 꼴은 둘이서 나란히 누우면 꽉 차버리는 더블 사이즈의 침대로 족했다. 다행이야… 둘은 그렇게 나란히 두 번째 맥주 캔을 깠다. 그렇게 두 사람의 8월이 밝았다.

 

 

 

 

2.

폭풍 같던 7월 마지막 주가 지나자 놀랍게도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가해졌다. 민규는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전부 끝나서, 석민은 공연이 마무리 되어 짧은 여름휴가를 받아서. 의도치 않게 생긴 겹휴일에 둘은 환호했다. 웬만하면 밖으로 나도는 것을 선호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여름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매미조차 제대로 울지 않는 바깥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둘은 좌절하지 않고 대신에 행복한 방콕 라이프를 준비했다. 피서는 뭐니 뭐니 해도 시워언한 방콕이 최고지! 아자!

 

그러나 두 사람의 희망은 결국 장렬히 전사한 에어컨과 함께 와장창 깨졌다. 물이 줄줄 새는 에어컨처럼 둘의 마음에서도 눈물이 줄줄 샜다. 어째 멀쩡해졌다 했다… 방콕 첫날부터… 하는 생각이 둘의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3.

야, 오늘 정말 덥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야, 오늘이 어제보다 더 덥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에

아, 오늘이 진짜 농담 안하고 지금까지 중에 제일 더워!

 

민규의 더워 타령에 덩달아 열이 받은 석민은 마시고 있던 물을 컵째로 싱크대에 집어넣었다. 던지다시피 한 컵이 뿜어낸 찬물을 제 티셔츠로 받아는 석민은 민규를 일으켜 세웠다. 얼떨떨해 보이는 민규의 얼굴에 굴하지 않은 석민은 그대로 민규가 입고 있던 얇은 티셔츠를 훌렁 벗겨버렸다.

 

“야, 잠깐만! 뭐 해?! 안 돼!”

“돼!”

 

으악! 민규의 다소 경박스러운 비명에도 석민은 굳세게 손을 놀렸다.

 

 

 

 

4.

그 결과 석민은 감기에 걸렸다.

그러고 나서 머리도 다 안 말린 채 잠들어 버린데다, 침대 옆을 보니 잠결에 틀었는지 선풍기가 달달달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여름엔 용케 감기에 걸리지 않기에 안심하고 있었던 게 실수였나 보다. 코도 막혔고 목소리도 걸걸한 것이…

 

어제 먼저 시작한건 너면서 니가 아프면 어떡해.

나도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만 물어봐줄래.

애초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니가 더워로 돌림노래 불러서 짜증나게 만들었잖아.

야, 이게 날씨가…

푸엣취!

 

 

 

 

5.

석민이 침대에 주저앉아 머리를 몇 번을 쓸어 넘기는 동안 민규는 진작 일어나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감기 걸릴 만 했네~ 하고 석민을 놀리는 여유까지 부려가면서. 석민의 속이 슬슬 간지럽기 시작했지만 궁금한 게 따로 있었던 석민은 그것을 재채기 한 번으로 넘겨야했다.

 

"너 어디, 가?"

"회사에서 급하다고 불렀어."

"휴간데 불러? 게다가 이 시간에?"

“그르게나 말이다. 매너도 없지.”

 

민규는 불퉁한 얼굴로 혀를 찼지만 내심 미안해했는데, 그걸 받아주는 석민의 입꼬리가 평소 같지가 않아서였다. 진짜로 많이 아픈가보다 싶어서. 민규는 이렇게나 상태가 메롱인 석민을 정말 간만에 봤다. 여름감기는 개도 안 걸린 댔는데 저와 석민은 아무래도 개였다. 여름감기는 둘의 연간 행사 수준이었다. 올해는 둘 다 그래도 좀 건강한 것 같았는데 하필 어제 밤에… 민규는 코나 좀 훌쩍거리고 말던 작년의 저와 석민을 떠올렸다. 분명 어제 시작한 것이 저가 아님에도 석민의 상태가 괜히 양심이 찔리게 하는 비주얼인 탓에, 아무래도 중간에 나와서 죽이라도 사다 먹여야겠다, 하고 마음먹게 되어버렸다.

 

"야, 그냥 더 자. 너 휴가 언제 끝나더라?"

"어으어어… 10일부터 다시 나오랬어…"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웅얼거리며 말하던 석민이 베시시 웃었다. 멋쩍은 얼굴이 꽤 귀엽다. 음… 달력을 보니 오늘은 6일이었다. 얘 그 안엔 낫겠지… 낫, 낫겠지?

 

"너 눈 풀렸는데."

"진짜?"

"내가 이따 점심되면 죽 사올게. 너는 자고 있어."

“나 너무 더워…”

“오늘 하루만 참어. 미안해. 정 더우면 다시 샤워하고 꼼꼼히 닦고, 머리도 다 말리고. 응? 나 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 어머님이라던가, 부승관이라던가.”

 

이불 뭉텅이가 된 석민을 그대로 뒤로 눕힌 민규가 망설임 없이 석민의 볼에 뽀뽀하고 떨어졌다. 내가 맘 같아서는 죽은 직접 만들어 줄 텐데, 하고 덧붙인 민규는 짐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석민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손을 비죽 들어 흔들었다. 민규에게 보일 각도가 전혀 아니었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거지.

 

민규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안보였겠지만.

 

 

 

 

6.

10시 밖에 안됐네. 아무튼 석민은 들고 있었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세 시간만 잘까…? 두르고 있던 이불에 코를 박고 눈만 끔뻑거리던 석민은 슬슬 올라오는 열기운 때문일까, 별 시답잖은 생각도 못해보고 금세 잠들어버렸다.

 

오랜 꿈

​가치

7.

오늘 못 올 것 같다고요? 알았어요… 응. 너무 걱정은 말고. 괜찮아요! 친구들 더 부르면 되니까. 응. 더우니까 시원하게 하고 있으세요, 저녁도 꼭 챙겨먹고… 알았어요. 네. 잘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엄마도 무리하지 말구요. 응.

 

"뭐라고 하셔?"

"못 오실 거 같대. 예상은 했는데."

"아 어머님 정말… 승관 아들램 노래 부르는거 언제 보실라구…"

 

승관이는 애써 저가 더 실망한 것처럼, 우리 엄마에겐 들리지 않을 심통을 부렸다. 먼저 살갑게 어머님 어머님 하던 것을 엄마도 기꺼워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나야 익숙한 일이고,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이럴 때마다 내 주변인들이 난리법석인 것이,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님에도 아직까지 어색했다.

 

"너는 누구 불렀어?"

"일단 누나들이랑, 친구들? 근데 아직 연락이 없네."

 

승관이의 친구들이라고 하면, 특히 항상 말하는 것이 저만한 여자애와 이 두 사람 보다 머리 하나 더 있는 남자애. 지옥 같던 고등학교 생활을 같이 보냈었던 지겹지만 친한 사람들이고 친구들이라던 말이 기억 속에 좋게 남아있었다. 남자애가 나랑 동갑이랬던가?

 

“그 둘?”

"응. 둘 다 불렀는데 이 인간들도 안 올랑가봐."

"아직 한 시간 남았는데 뭐. 오겠지."

 

아닌 척 하지만 신경 쓰고 서운해 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모른 척 손에 포카리를 쥐어주었다. 승관이는 물론 내 나름의 은근한 위로를 찰떡같이 받아드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8.

처음엔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았다. 평상시에 공연을 하던 동아리관 세미나실의 대여에 차질이 생겨 그 다음으로 작은 대학본부의 것을 빌렸는데, 그 곳의 크기가 우리 생각보다 더 컸던 탓에 공연 순서가 크게 조정되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내가 불려온 것이기도 했다. 원래 동아리 공연은 어느 정도 기수가 차면 알아서 물러나는게 일반적이었으니까. 불려나와 봤자 다들 바빠서 몇 명 못나왔지만 그 몇 명에 내가 속해있다는 것이 지금 동아리 실구성원들에게는 놀라운 것 이었나보다.

 

사실 스스로도 왜 하겠다고 한 건지 의문스럽긴 했다. 입대 전에 목쉬어라 연습하다가 진짜로 목소리가 안 나오는 바람에 병원에 갔던 기억은 군대가 먹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형 이제 노래 안 할 거라며! 승관이가 기다시피 부탁한 것을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눈이 튕겨 나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지가 불렀다는 건 잊어버린 모양이다.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냥… 거 안한담서요.

난 노래 안한다고 한적 없는데… 동아리 무대 이제 그만 서겠다고 했지.

근데 하신대매.

하하.

 

술이나 마셔라. 내 바로 윗 학번의 동아리 선배인 지훈이 형이 우리를 일갈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술이나 마셨다.

 

 

 

 

9.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초박살이 났다. 나는 이 상황에 내가 노래하는 직업을 꿈꾸는 것이 벅찬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엄마는 이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나는 고집으로 그런 엄마를 이겼다. 엄마에게 이렇게 떼를 쓰다시피 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엄마는 이번만큼은 네가 어려서 모르는 거다, 하며 나무라지 않았다. 엄마도 결국 납득했다. 나와 엄마는 멀리 있는 내 꿈을 보는 것 보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을 택했다.

 

지금은 정말 괜찮아졌다. 있던 빚도 다 갚았고, 본래 목표하던 사립대를 포기하고 커트라인이 조금 낮은 국립대를 노려 성공적으로 입학까지 마쳤다. 긁어모을 수 있는 장학금은 전부 모았고. 더불어 집안이 그렇게 되고 난 뒤 내 생활비는 내가 벌어서 쓰고 있는 상황이니 좀 빠듯하더라도 집에 크게 무리가 갈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에게 다시 노래를 시작하겠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고, 엄마도 마찬가지로 내게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신 차려보니 나는 이 노래 동아리의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꽤 길게 고민한 것이 불필요했다고 느껴질 만큼 순식간이었다. 좀 여유로워졌으니 다시 해 보겠다 이건가? 나는 자조했지만 다시 잡아본 마이크는 그 이상으로 내게 큰 의미가 되었다.

 

 

 

 

10.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동아리 면접날 내가 가장 먼저 만장일치로 뽑혔다고 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한창 노래하기 좋아하던 17살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엄마와 십여 년 만에 마주앉아 울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안 그랬는데! 한바탕 울고 난 후 멋쩍어진 엄마와 나는 나와 엄마의 어린 시절 서로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11.

입대하기 한 세달 전쯤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덜컥 겁이 나서 부리나케 병원에 갔다. 성대결절은 아니라고 했다.

근데 학생, 무슨 일 해요?

아 저… 딱히.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하게 말 해봐요, 하는 알바라던가 뭐, 노래 부르는 일 해요?

노래는… 동아리가 노래동아리라 거기에서만 부르는데… 알바는 야간에 식당도 하고 좀 이것저것…

그걸 다 몇 시간 동안 하는데? 그러고 학교가요? 학생, 큰일 나 그러다. 진짜로 성대결절 걸리는 수가 있어. 학생 성대가 되게 약해. 계속 노래하고 싶으면 몸 챙겨야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이 말이 이상하게 진짜로 성대결절이라는 말보다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군대에 가야했으니 자동으로 정기공연에서 제외되는 대상이었다. 공연은 보통 절반 이상을 1학년으로 꾸렸고 나는 그때 1학년 2학기였다.

 

그래도 보통 공연 전에는 참가 의사를 물어보는 편인데, 당시 정기공연 리스트에 내가 아무 말 없이 올라있는 것을 보고 잠시 의아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만류하는 동아리장에게 나는 고집을 부렸다.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엄마도 꺾지 못한 내 고집을 그가 꺾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역시 그랬다.

 

난 조용히 입대했고, 2년 간 노래를 다시 잊었다. 난 18살 때로 다시 돌아갔다.

 

 

 

 

12.

제대 후 참여한 학기 첫 동아리 회식에 나갔다.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지훈이 형이었다. 형은 내게 승관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우리에게만 들리게끔 몸을 기울이고 얘가 작년부터 들어온 애들 중에서 제일 노래 잘한다. 하고 근엄하게 말했다. 승관이는 새침하게 웃었다.

 

어쩌다 승관이가 내가 노래 부르는 영상을 본 것 같았다. 형은 무대 다시 안 서세요? 형들이랑 누나들이 엄청 벼르고 있던데, 무대 세울려구. 조심스레 묻는 승관이에게 내 얘기를 얼버무렸다. 어쩌다보니 처음부터 얘기하게 되어 길이가 길었지만 승관이는 좋은 관객이었다. 한창 스펙타클하게 변하던 승관이의 얼굴이 끝에 가서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무대를 거부하던 내 얼굴이 저랬을까 하고 잠깐 동안 생각했다.

 

너 아마 그때 그만 하겠다고 안했으면 졸업할 때까지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을 걸? 노래 좀 한다하는 애들은 일단 리스트에 넣고 봤었으니까… 너 노래 진짜 잘해 임마. 그래도 니가 싫으면 싫은거지. 말없이 넣는 건 무례하다는 거에 동의하는 편이기도 하고, 암튼 어쩔 수 없지…

 

지훈이 형이 이렇게 말했다. 그치만 역시 마음이 다시 동하지가 않았다. 형은 혀를 찼고 나는 그냥 실실거리기만 했다.

 

 

 

 

13.

그런데 이걸 또 어쩌다가?

나는 승관이와 지금 동아리장인 현태에게 이번만 나가는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두 녀석에겐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14.

뭔가 큰 의미를 가지고 했던 말을 번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 나도 꽤 고민이 많았는데, 결론 내려 보자면 결국엔 미련이었다. 동아리에 들어온 계기가 분명 미련이었으니, 그렇게 시작해 그렇게 끝날 것에 후련한 마침표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 노래 하나만 바라보고 달렸던 나를 위한 작별인사 같은 걸 바라고 있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나를 위한.

 

 

 

 

15.

“형 몇 번째더라?”

“나 뒤에서 두 번째.”

“아… 나랑은 조금 멀구나. 하긴 형은 학번으로만 보면…”

“뭐.”

“히히.”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로 킥킥대다가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관객석 옆 계단에 순서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원래 공연하던 곳에서는 이렇게 앉으면 지나다닐 자리가 없어 애를 먹었었는데 이곳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나만 깨달은게 아닌지 곳곳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잔뜩 긴장한 1학년들이 내는 것 같았다. 역시 엄청나게 긴장한 것 같은 승관이가 눈에 들어와 어깨를 적당히 토닥여주고 자리를 옮겼다. 정작 나는 그다지 떨리지가 않아서 어찌된 영문인가 싶었지만, 가수들이 은퇴무대를 가지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별 생각을 다 해.

 

 

 

 

16.

어느덧 승관이의 순서가 다 되어 승관이는 무대 바로 앞까지 간 상태였다. 저 앞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손을 붙잡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실루엣만 딱 봐도 키가 크고 잘생겨 보이는 잘 차려입은 남자가 특수요원마냥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다. 조용히 연다고 노력해도 절대 의도와는 다르게 쇳소리를 내는 문에 놀랐는지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가, 밖의 빛이 조명이 다 꺼져 있는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급히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 옆에 다행히 현태가 서있어서 더 크게 소리 내려 하던 문이 가까스로 가볍게 닫힐 수 있었다.

 

남자는 한참을 뭔가 부스럭거리다가 맨 뒷줄에 비어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마침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곧 이어 승관이가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는지 발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언뜻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착각이겠거니, 무대로 눈을 돌렸다. 악 소리를 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프로와도 같은 승관이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승관이는 긴장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태도와 실력으로 무대를 마쳤다. 나는 내 차례를 기다렸다. 떨리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꽤 긴 시간이 흐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17.

어…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학과에 다니고 있는 16학번 이석민이라고 합니다.

저는… 군대를 다녀왔구요. 지금까지 무대에 올라온 친구들은 다 18학번들이었죠. 지금부터는… 어느 정도 연령대가 높아질 겁니다. 하지만 노래하는 데에 나이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학은 이쯤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민망하지만 제가 꽤, 노래를 좀, 잘해서. 으하하, 아, 진짜 부끄럽네요.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시구요. 그치만 역시 노래를 못하는 편…은 아니라 정기공연에 계속 출석할 예정이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꽤 오래전부터 그러지 않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무대에 올라온 건 여러 사정이 겹친 것도 있고, 부탁도 받아서요. 기쁘게 승낙은 했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아마 이번 무대가 동아리 구성원으로써 마지막 무대가 될 것 같아요. 아직 노래도 안 불렀는데 이런 말부터 하니까 굉장히 웃기네요. 오늘 공연 마지막 순서인 분이 저한테 말 좀 많이 하라고 했는데, 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아, 저 잘생겼다고요? 와, 감사합니다. 올 해 들어서 그렇게 큰소리로 칭찬 들은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하하.

아까 승관이라고, 노래 되게 잘했죠? 그 친구가 꼭 무대에서 자기 얘기를 해달라고 그렇게 사정을 하더라고요. (제가 언제요!) 저거 봐. 오리발 내미는 거. 그쵸? 근데 노래 진짜 잘 했죠? 아, 제가 다 뿌듯하네. 현태도 노래 잘 했죠. 서연이 표현력은 거의 뮤지컬 배우 급이고요. … … …

음, 이젠 정말로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네요. 이 이상 하면 혼날 것 같으니까. 제가 준비한 노래는 요새 자주 듣는 노래인데, 여러분들도 들어주셨으면…해서? 준비해 왔습니다. 영광스런 제, 흐흐, 마지막 무대를 들어주실 여러분께 미리 감사인사 드립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18. 

https://youtu.be/I_e-2EnD3uQ

 

19.

정기공연이 끝났다. 세미나실의 조명이 전부 켜졌다.

 

“와, 형!”

“어이구, 승관아. 수고했어.”

“형 노래 장난 아니네. 현장감이 진짜… 와, 엄지척.”

 

양손 엄지를 쌍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에 소리 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달려오다시피 한 승관이의 짧고 굵은 칭찬에 기분이 좀 더 좋아졌다.

 

“각 잡고 부른다고 한 건데 잘 모르겠네.”

“아냐, 진짜, 지이이인짜 좋았어. 형 아껴둔 보람 있다!”

“크크, 고마워. 다음에 밥 한번 먹자.”

“무슨 벌써 그런 말을 해? 이따 술 한 잔 걸치고 다시 얘기하시죠?”

“아이고, 알겠습니다.”

 

 

 

20.

“석민아, 오늘 수고 했다.”

“형도요. 형 노래 오랜만에 들으니까 되게 좋네요.”

“난 니 노래 부르는 목소리 까먹을 뻔 했지.”

 

지훈이 형은 시니컬하게 코웃음 쳤다. 그것마저도 솔직히 귀여워 보인다고 하면 혼나겠지. 괜히 티가 나도록 샐쭉하게 만든 내 입모양을 당연히 본 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형은 나를 잠깐 보기만 하더니 됐다, 하고 손사래를 쳤다. 뭔가 말할 것이 있으면 곧이곧대로 말하는 형답지 않은 일이었다.

 

“뒷풀이 갈 거지? 그거까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아, 알았어요. 진짜 형 눈 그렇게 뜨는 거 너무 무서워.”

“무서우면 내가 이런 식으로 눈 뜨게 하는 일 없게 하면 되잖어.”

“나는 형이 아니라 형이 왜 그런 표정 짓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난 현태 좀 도와줘야 하니까 너는 가서 애들이랑 얘기 쫌 해라.”

“옙. 수고하십쇼.”

“이따 부르면 튀어와.”

“옙.”

 

아 뭐야! 김민규 왔네?! 승관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도 튄다. 형과 눈이 마주쳐서 픽 웃어버렸다. 형이 고갯짓 하자 나도 자리를 옮겼다.

 

 

 

 

21.

승관이 근처로 가자 기다렸다는 듯 승관이가 나를 칼같이 불렀다. 형! 하는 밝은 목소리에 자연스레 끌려간 나는 아까 전의 남자와 마주쳤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근데 남자가 자꾸 승관이 뒤에 숨으려고 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형, 이쪽이 맨날 말하던 김민규!”

“야, 넌 내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반말로 소개해줘야겠냐?”

“뭐 어때. 가끔 형이라고 불러주잖아. 이쪽은 석민이 형.”

 

어색해하는 얼굴이 급변해 승관이와 투닥거리는 모습이 역시 승관이 친구구나, 하게 만들었다. 아까 세미나실에 들어 올 때의 머쓱해보이던 표정과 행동이 무색하게도 민규라는 남자는 꽤 압도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들어 본 일반인 남자 중에 제일 미남인 것 같기도 하고.

 

"네, 그,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불쑥 세모눈을 뜨는 남자에 기습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나는 신경 쓰지 않는지 남자는 잠깐 승관이를 째려봤고 승관이는 이에 지지 않고 거만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중요한 게 이게 아니구."

"네?"

"노래… 잘 들었어요. 진짜 좋았어요, 빈말이 아니고 진짜로요."

 

남자의 눈은 너무 진지해서 가볍게 칭찬을 받으려던 마음이 절로 수그러들었다. 생판 남이 면전에 대고 하는 노래 칭찬을 들어본 것이 언제 적이더라. 괜한 감상에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 정신을 차리려고는 해봤지만 이상하게 푹 치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내 목구멍 깊숙한 곳을 되려 간지럽게 했다.

 

잠깐 멍을 때렸다가 이내 내가 감사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을 가다듬고 감사하다고 말을 하려는 찰나에 남자가 갑자기 대화하다 말고 몸을 숙여 가까이 있던 좌석의 아래 부분을 더듬었다.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났던 그 소리? 남자는 이내 큼직한 것을 꺼내들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꽃다발이었다.

 

"저, 이거…"

"엑."

 

근데 이걸 왜 저한테? 당연하다는 듯이 내미는 바람에 덥석 받아들긴 했는데 상황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아닌가, 당연하게도가 아닌가. 아무튼 승관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야, 그거 나 주려고 들고 온 거 아니었어? 이 형을 왜 줘??"

“몰라. 걍 너 주기 싫어졌어.”

 

그거 어디서 난거야? 하는 말을 상상했던 내 기대를 와장창 깨부순 승관이의 물음에 남자는 한층 더 까칠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내 표정을 확인하는데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얼떨떨하면서도 이해가 안가고 너무 웃겨서 자꾸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어허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어. 어어?"

 

뭐지? 노잼 만담 쇼인가? 남자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급하게 내게 인사를 하고 우리로부터 멀어졌다. 그냥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것이 점점 보폭이 넓어져 문까지 다다랐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현태라는 브레이크가 없었던지라 거의 천둥소리에 가까운 굉음을 내며 문이 활짝 열렸지만 그걸 들은 사람은 우리와 뒤쪽의 음향 조절실에 있던 현태, 지훈이 형뿐인 것 같았다. 형이 인상을 잔뜩 쓰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느릿하게 다시 닫히려는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그 뒤로 승관이도 따라왔다. 끄와아앙 하는 무거운 소리가 두 번, 세 번 대학본부 1층을 울렸다.

 

"저기요!! 잠깐 얘기라도 더!"

"야 김민규! 너 어디가!!!"

 

이런 식으로ㅡ어허허 감사합니다라니!ㅡ인사를 하려던게 아닌데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 내가 저 사람을 어디까지 따라가야 하는거지 + 잡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지. 발걸음을 옮길수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점점 속도가 늦춰지는 반면에, 그를 이곳에 불러낸 주범인 승관이는 어이가 단단히 나갔는지 걸음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나는 결국 가던 길을 멈추고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것을 품에 안았다.

 

"꽃다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야!!!”

 

그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말이 들렸을지는 잘 모르겠다. 뒤에 따라온 승관이의 비명과도 같은 악 소리는 분명 들렸겠지만.

 

아. 품에 남아있던 꽃다발이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이렇게 품에 안고 있었지? 나는 꽃다발을 가까이 당겨 꽃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미적지근하게 나는 꽃내음 같은 것이 어쩐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22.

근데 다음에 또 오라는 건 다음에 또 공연 하겠다는 소리야?

아? 그게 그렇게 되나? 형 근데 언제 나왔어?

오늘 얘기 좀 할래?

엄… 생각 좀 해볼… 아 지훈이 형. 형 못 들은 척 하지 말고! 형!

 

 

 

 

23.

노래만 생각하고 살았던 어린 나. 작별인사는 어쩌다보니 얼렁뚱땅 미뤄지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어쩌면 이걸 가장 바란 걸지도 몰라.

 

 

 

 

* * *

 

 

24.

 

“…”

 

…꽤 긴 꿈을 꿨다. 오래전 일에 대한 꿈이었던 것 같은데.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6시였다. 시간만 봐서는 절대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 방 안을 둘러보니 어느새 커튼이 쳐져있었다. 방문은 꼭 닫혀있었고 선풍기도 틀어져 있지 않았다. 이랬는데 점심도 안 먹고 중간에 깨지도 않고… 잘도 잤네… 이불을 걷어내니 그제서야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눈에 들어왔다. 씻어야지. 하고 비척거리며 문을 여니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소리는 미약했지만 녀석은 귀가 좋은 편이었던 터라 어렵지 않게 내 기척을 들은 것 같았다.

 

“잘 잤어? 헥, 땀범벅이네!”

“나 꿈 꾼 거 같애…”

“왜. 나쁜 꿈이었어?”

 

헐레벌떡 다가온 민규는 손수 욕실 문을 열어주기 까지 했다. 내가 욕실 문 열 손도 없게? 하고 톡 쏘았지만 목소리에 힘이 부족해서 그닥 효력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욕실에 들어가려다 민규가 무언가 물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잠깐 곰곰이 생각했다. 나쁜 꿈이었나?

 

“아니, 꽤 괜찮은 꿈이었어.”

“어떤 꿈이었는데?”

“음… 모르겠어. 근데 니가 나왔어.”

 

그것만 생각났다.

 

 

 

 

25.

내가 나온거면 꽤 괜찮은 정도가 아니네. 완전 좋은 꿈이잖아?

뭐래…

길몽이지, 길몽.

생각해보니 승관이도 나왔던 거 같아. 지훈이 형도…

 

꿈에 나만 나와야지 뭐 그렇게 잡스럽게 아무나 나와?

걍 아무나 말한거긴 한데, 잡스럽게가 뭐야, 진짜. 지훈이 형한테 이른다.

그치? 그럴 줄 알았어.

 

부축을 받을만한 상태인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조용히 녀석의 호들갑을 받아주었다. 승관이와 지훈이 형도 꿈에 나온 것 같기도 하지만,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정말로 이건 너에 대한 꿈이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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