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꽃
석민이 민규와 친구가 된건 12년전 할머니집이 있는 산에서였다. 그당시 할머니집에서 살던 석민은 집 앞의 산과 계곡에 놀러다녔었다. 마땅히 같이 놀만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혼자 놀러다녔었는데, 산에서 길을 잃었었다. 처음에는 괜찮을거라다가도 계속해서 내려가지 못하고 해메자 어렸던 석민도 무서운 맘에 엉엉 울며 산을 돌아다녔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났던게 민규였다.
‘왜 울고 있어?’
‘길을 잃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게, 그때 자기만한 아이가 산에서 너무 당연하게 말을 걸어왔는데도 길을 잃었다고 대답하고, 걔가 길을 데려다주고, 그러다 친구가 돼는게 너무나도 흔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 지금생각핻 너무 어이가 없었다. 와, 나 진짜 생각 없긴했네. 옆을 흘끔 보면 꼬리랑 귀도 다 내놓고 할머니가 쪄준 감자와 옥수수를 먹고 있는 김민규를 보며 등을 한 대 퍽, 쳤다.
야, 왜 때려!
그냥 좀 얄미워서.
넌 그리고 뭔 여우가 이렇게 많이 먹어? 어이없다는 듯 벌써 절반이 비워진 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봐도 어깨만 으쓱이며 손에 들린 옥수수를 마저 입에 넣었다.
“이번엔 언제 내려가?”
“어, 아. 월요일 아침에 일찍 갈거야. 학교로 바로 갈거라서.”
다음주 방학이거든? 그때는 두달정도 있을거야. 좋지? 씩 웃으며 가방에서 보리차를 건네 민규에게 건네주었다. 할머니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뒀냐며 엄마는 뭘 그렇게 내려가나 싶지만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다만 가서 할머니 귀찮게 하지말라며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야, 근데 그때 왜 나 도와줬어?”
먹은 것들을 다 정리하고 뒤로 드러누운채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석민이 몸을 돌려 물었다. 한 번도 물은적이 없었다. 그때 이후로, 당연하게 친구가 되어있었으니까. 김민규는 이석민의, 이석민은 김민규의. 그때 이후로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며 찾아봤었다. 여우에 대한 것과 신비한 존재들에 대한. 결국 나중엔 그것들을 물어봤던 나한테 김민규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알려줬었다.
이 산을 지키는 신령이며, 자신이 성년이 될 때 이 산을 물려받는다고 했다.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훼손이나 동물들을 지키며 산에서만 살아가며 절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데도 그때, 민규는 석민의 앞에 나타나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길을 안내해줬다.
“그냥.”
“뭐?”
“그냥 도와줬다고. 못생긴게 너무 시끄럽게 울길래.”
가방에서 보리차를 꺼내 마시던 민규의 대답은 간결하기 짝이없었다. 와, 대박. 못생겼다니. 야, 내가 뭐가 못생겼어! 소리를 빽 지르는 석민에 민규가 인상을 찌푸리며 석민을 쳐다봤다
“얼굴은 눈물이랑 콧물투성이에 벌겋게 달아올라가지곤.”
“야 그래도 뭐 있을거 아냐. 절대 안 나타난다면서.”
근데 너는 내 앞에 너무 당당하게 나타났었잖아. 석민의 질문에 민규의 꼬리가 살랑 거리며 움직였다. 그러고보면 그때 저 꼬리와 귀는 없었는데. 뭔가, 싶다가도 나중에 민규를 만나러 올때마다는 항상 귀와 꼬리를 달고 있었다. 그때 나를 데려다주려고,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싶어 숨긴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살랑 거리는 꼬리와 함께 약하게 부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약하게 부는 바람이 열기와 더위를 식혀 기분이 좋았다. 푹신한 꽃침대와 약하게 부는 바람, 살랑거리는 김민규의 꼬리와 말랑해보이는 귀를 보며 그냥 웃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채 자신쪽은 절대 쳐다보지 않는 민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석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네가 그때 나 길 찾아줘서 진짜 좋았어.”
“그때 친구가 없었거든, 여기는 다 어른들 뿐이라. 그리고 길 잃어서 무서웠는데 데려다주고.”
지금말하는데, 고맙다! 쑥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몸을 대자로 뻗은 석민에 가만히 있던 민규가 푸하하! 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끅끅 거리다가도 석민에게 다가가더니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석민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마웠어? 고마워? 얼마나 고마웠는데 우리 석민이?”
“아 이 미친놈이, 야 그만해!!”
식겁한 얼굴로 민규를 발로 퍽퍽 쳐대며 손으로 얼굴을 밀어대는 석민에도 꿈쩍않은 민규가 느끼하게 물으며 말을 걸었다. 투닥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이 기분좋게 불었다.
*
아침 일찍 장을 보러 간다는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나온 석민은 짐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거의 다 먹어간다는 수박도 사고, 나물도 사고 저녁에 닭 삶아준다며 사시는 생닭도 들고. 시장에 파는 호떡도 할머니와 한 개씩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온것들을 정리하며 오늘도 나갔다올꺼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이쪽에 살아?”
“음, 그건 아닌데 여기가 좋데요.”
물좋고 공기 좋다나.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 한모금을 마신 석민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박도 싸가, 어제 감자랑 옥수수 싸갔지? 옥수수 더 쪄줄테니까 가져가고.”
“와, 할머니 올때마다 이렇게 먹여대서 내가 맨날 살이쪄서 올라가.”
투정을 부리면서도 할머니 볼에 뽀뽀를 한 석민이 씩 웃은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좀 일찍 내려와서 내일은 더 일찍 온다며 민규와 약속했었다. 가방에 할머니가 건네는 수박과 옥수수를 챙겨넣으며 가방을 맨 석민이 저녁에 일찍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여름의 해는 길고, 덥다. 익숙하게 산을 오르며 발걸음을 옮기던 석민이 말소리가 들리기에 의아하게 여기며 조금 더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서, 말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그래서…, 빨리,”
“내가…할 게요!”
잘 들리지는 않았다. 항상 민규와 놀던 곳에는 다른 사람이 한명더 있었다. 그 사람한테도 귀와 꼬리가 달린걸 보고, 석민은 아, 하며 멈춰서있었다. 중요한 얘기를 하는 듯 했다. 심각해보이는 얼굴과, 태평한 것 같으면서 짜증스러운 민규의 얼굴. 한참을 서있던 석민이 고개를 돌린 민규와 눈이 마주쳐 그제야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이렇게 인사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자신과 눈이 마주친 민규가 앞에 있는 사람과 뭐라말 하더니 이내 그 사람은 자기쪽을 한 번 보더니 앞쪽으로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석민은 그제야 민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왔는데 왜 멍청하게 거기서있어?”
“아니, 얘기 하고 있길래…심각한 얘기 하는 거 아니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석민의 조심스러운 말에 픽 웃은 민규가 자리에 철퍽 주저앉으며 옆자리를 탁탁 쳤다.
“뭐, 결혼하라는거지.”
“어 그래 결…뭐??“
“결혼하라 한다고. 귀찮아 죽겠네.”
결혼하라는 말을 무슨 동네 마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말하는 민규에 석민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곤 오늘도 옥수수랑 감자 싸왔냐며 가방을 탐내는 손에 가방을 치우며 흥분해서 물어댔다.
야, 웬 결혼? 무슨 결혼? 왜? 너희 종족…아니 뭐 여우는 결혼 지금해?
그냥 뭐, 곧 18살 생일이니까 이제 산 물려받으려면 준비하라는거지.
배고프니까 그거 빨리 줘. 귀찮다는 듯 손짓하는 민규에게 옥수수를 하나 꺼내 물려준 석민이 신기한 듯 물었다.
“18살 생일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
“우리들은 18살 생일이지나면 성년이야. 그리고 그때 부모가 관리하던 산을 넘겨받고.”
그리고 그럴려면 반려, 그래 배우자가 있어야돼. 왜그런진 몰라도 그냥 그게 옛날부터 전해져내려온 풍습이라나. 내가 듣기론 그냥 조금 더 안정적이게 산을 다스리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들었어. 민규가 해준말은 신기하기 짝이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자신들과 다르다고 느꼈다. 서른살이 넘어도 결혼을 할까 말까한 인간들과 20살이 넘어야 성년이 되는 인간. 반면 열여덟살에 성년이 되고 결혼을 한다는 말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결혼, 결혼….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옆에 앉아 옥수수를 먹는 김민규는 어렸을때부터 그대로였는데. 자기 키와 비슷하던 김민규는 중학생이 지나고 나서는 석민보다 훨씬 커져있었다.
“근데 그러면, 꼭 해야하는거 아니야?”
“뭐…그렇겠지? 게다가 저렇게 잔소리 하는거보니 안 하면 산도 안 물려줄거같더라고.”
“그럼 넌 뭐 마음에 드는 여우…아니 사람? 있어?”
석민의 물음에 옥수수를 먹던 입을 멈춘채 고개를 돌렸던 민규가 픽 웃었다.
“네가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
“나는 네가 마음에 드니까, 네가 나랑 결혼하면 좋겠다고.”
얼이 빠진 석민이 넋을 놓고 민규를 쳐다봤다. 금세 먹고 있던 옥수수를 다 먹은 민규가 옥수수 심을 봉지에 넣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네가 내 반려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거야.”
네가 좋다고, 나는.
*
‘어렵게 생각 안 해도 되.’
‘그냥 네 생각을 들려줘.’
‘네가 물어서 대답한거고, 네가 그저 알아줬으면 해서 말한거야.’
네가 싫다면 싫다해도 되고, 좋으면 좋다고 해줘. 나는 온전히 네 선택을 존중하니까. 민규의 말은 고백치곤 담백했고 정말 그저 내가 알아줬으면 했다는 말이 와닿았다. 그 뒤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간식을 같이 까먹고 놀다가 할머니집에서 백숙을 먹고, 다음날 학교로 바로왔다. 어이없게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하루에 석민은 헛웃음이 났다.
“와, 진짜 어이없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수가 있지. 김민규가 하던 말을 보면, 결혼은 반드시 해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걔는 그걸 나랑 하고 싶다고 나랑…, 무슨 같이 과자먹자. 하는 듯 말한 것이 아직도 웃겼다.
‘다음주에 보자.’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다음주에보자. 주말에 보자. 김민규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고, 나도 그렇게 헤어졌다. 걔는,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렇게 얘기한걸까.
12년, 소꿉친구, 나만 아는 친구, 나만 아는 김민규, 여우 김민규, 특별한 김민규.
어느수식어 하나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사이였다. 나만 아는 존재였고 나만 아는 내 소꿉친구였으며 사람이 아니면서 여우였고 산을 지키는 신묘한 존재였다.
나한테는 차이가 없으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애초에,
‘네가 나랑 결혼하면 좋겠다고.’
난 남자라고! 아니면 그쪽에선 아니 여우들…, 약간 그런게 없는건가? 여자 남자, 아니 암컷 수컷 구별이 없나? 아니 그리고 난 인간인데. 아니지, 애초에 난 이걸 왜 생각하고 있지? 당연하게 거절하면 되는데.
‘우리 친구잖아.’
그 한마디면 되는데, 진짜로. …진짜 그 한마디면 되나? 12년 간의 김민규, 나랑 똑같던 키의 김민규 이젠 나보다 더 큰 김민규, 넘어져서 절뚝 거리던 나를 부축해주던 김민규 산탈때면 꼭 위험하지 않게 앞에서 자기 손 내밀면서 잡아주던 김민규, 나를 보면서 웃던 김민규, 예쁜 꽃이 핀다며 데려간 꽃밭에서 활짝 웃어보이던 김민규.
아, 그러니까….
“와, 미친.”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석민이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미쳤다, 진짜 미쳤네. 이석민 미친놈…. 아, 진짜 어이없다. 왜 거기서 그 얼굴이 생각난거야? 이석민 미친놈, 김민규도 미친놈. 아니 애초에 그 말도 안 했으면 안 이러고 있을텐데! 그냥 방학하고 내려가면 걔랑 또 뭐하고 놀지나 생각하고 있었을텐데.
‘18살이 성년이야. 그리고 산을 물려받고.’
나와 다르기에, 반드시 필요한것이고, 나와 걔는 친구고. 지금은 몰라도 김민규라면 분명 내게 말해줬을것이었다. 그 대상이 내가 아니어도, 결혼을 한다며 나한테 반드시 전하겠지.
“…아, 몰라 몰라, 나는 몰라!”
아직 방학식까진 사흘이 남았다. 그리고, 김민규를 볼 날도 사흘이 남았고.
*
여름의 밤은 덥고, 후덥지근했다. 그래도 매미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가는 바람과 시원한 선풍기를 쐬며 누워있는 석민은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았다. 항상 방학식이 끝나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할머니집으로 가던 석민이, 오늘은 하루종일 있다가 어물쩡거리며 밤 늦게 내려왔다. 덕분에 밤엔 처음와서 조심한다고 느려져, 더워서 느려져, 괜히 마음도 안 좋아서 느려져, 덥고 후덥지근하니 피곤함만 가득쌓였다.
와, 죽겠다. 진짜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가방만 내려놓은채 뻗은 석민은 씻고 자라며 먼저 잔다고 들어가신 할머니에 알겠다고 한지 30분정도 지났다고 생각했다. 지금 씻고 누우면 완전 꿀잠 잘거같은데.
눈만 끔뻑거리다 몸을 돌려누운 석민이 두발을 포개 자고 있는 누렁이도 봤다가 다시 몸을 돌려 대자로 몸을 펴고 눈을 감았다. 내일 일어나서 밥먹고 할머니 일 좀 도와주고, 과자 사온거랑 챙기고…, 몇시쯤 올라가지. 그리고 어떻게 걔 얼굴 보면서 무슨 얘기를 하지. 네가 그저 알아줬으면해서 말했다지만, 그렇게 쉽게 알고만 있을수 있을 리가 없잖아. 김민규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할테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불편하게 김민규를 대하고 볼꺼라는걸 너무 잘 알았다.
아, 진짜…나 왜이렇게 답답하지.
“나도 걔를 좋아해서 그런가.”
담담하게 터져나온 말은,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것 마냥 울림이 퍼져나갔고 아무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에 아, 하며 벌떡 몸을 일으킨 석민이 자야겠다며 안으로 쿵쿵 거리며 들어갔다. 미친생각이야, 미친생각. 정신 좀 차리자. 일단은 푹 자고 일어나는거야, 그래.
“…야, 너 얼굴이 왜그래?”
민규를 만나러 올라오며 싸왔던 과자들중 한 개를 까먹던 민규가 퉁퉁부은 얼굴로 옆에 앉아 보리차만 마셔대는 석민을 보며 물었다. 어제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잤어? 진지한 듯 묻는 말에 옆을 슥 쳐다보던 석민이 손을 뻗어 과자한개를 꺼내와 입에 넣었다.
“닥쳐.”
“꿈에 귀신이라도 나왔냐?”
“과자나 처먹어.”
귀신은 지랄, 니 때문에 잠을 못잔건데. 한숨을 내쉰 석민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가방 안에 있던 과자 한봉지를 더 뜯었다.
“올라가서 뭐했냐?”
“하긴 뭘해. 학교 다니면서 방학 기다렸지.”
내년 부턴 오고싶어도 못 와. 고3이야, 고3. 토하는 시늉을 하며 과자를 입에 털어넣은 석민이 손을 탁탁 털었다.
“내년엔 나도 이 산의 주인이 되어있을거야.”
“뭐, 너도 바빠서 만나고 싶어도 못만난다고?”
“넌 만나야지.”
이석민인데. 새 과자봉지를 뜯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민규에 뒤로 누우려다 멈춘 석민이 민규를 쳐다봤다. 자기가 한 말에 자각이 없는건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은건지 태평한 얼굴로 과자를 먹는게, 괜히 얄미웠다. 이 새끼 이거 일부러 이러나?
“너 결혼 해야한다며.”
“어, 해야지…”
“나한테 하자고 했잖아. 내가 안 해준다고 하면 어쩌게?”
괜히 심술이 나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과자에 정신이 팔린듯하던 민규가 석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뾰루퉁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석민의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 아, 귀엽네.
“신경쓰여?”
“뭐?”
“신경쓰이냐고.”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 할까봐? 과자를 입에 털어넣은 민규가 과자봉지를 석민의 손에 쥐어줬다.
“솔직히 기분은 좀 좋다. 당연히 넌 거절 할 거 같았거든.”
“야…”
“물론 강요하는건 아니야. 네가 거절해도 당연한거라고 생각하고, 그래도 나는 네 친구로 남았을거니까. 부담스러웠다는거 알지만, 정말 나한텐 당연한거라 네가 알아야했으면해서 말해줬을뿐이야. 우리는 아무렇지 않지만 일단 너와 나는 다르고, 내 생각을 알고 그래도 네 생각을, 마음을 알고 싶었으니까.”
거의 넋을 놓은듯한 석민을 보고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에 올 수 있어?”
“뭐?”
“저녁에, 내가 밑으로 내려가있을테니까 잠깐 나올 수 있냐고.”
“…왜?”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서.”
네 반응도 좀 귀엽고. 물론 뒤에말은 삼킨 민규가 웃으며 말했다. 찜찜한 얼굴로 그런 민규의 얼굴을 보던 석민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오는건 상관없었다. 산책 좀 하고 온다고 하면 되겠지.
“그럼 저녁먹고 꼭 나와. 알았지? 밑에 있을게.”
“아 알았어 새끼야!”
괜히 말이 거칠게 나왔다. 저녁에 나올테니까 먼저 간다며 가방에 과자봉지와 물병을 넣은 석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간다! 하며 빠르게 사라지는 석민을 보며 민규도 자리를 떴다.
*
“나 갔다올게요!”
“조심히 갔다와! 앞 잘보고!”
저녁을 먹고 너무 배가 부르다며 잠깐 산책을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반팔에 반바지, 올 때 가져온 모기 방지 팔찌를 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마냥 익숙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석민은 내심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길에 있는 담벼락이 그렇게 커보였고, 나무들이 그렇게 높아보였었는데. 서울에 있는 집도 집이지만, 석민은 이곳도 참 특별했다. 어렸을적 시절을 다보내고, 소중한 친구를 만나고 좋은 추억을 더 많이 쌓은 곳. 공기가 맑아 별도 잘 보였고, 가끔 반딧불이도 봤었다.
“야, 김민규!”
입구쪽에 다다르자 김민규가 서있었다. 살랑 거리는 꼬리를 보며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돌아본 김민규가 손을 흔들었다.
“근데 뭐 보여주게?”
밤의 산행은 정말 길에 익숙하거나 눈에 익은 사람들이 아닌이상 위험했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듯 나란히 걸으며 올라가는 익숙한길에 석민이 물었다. 석민의 물음에도 그저 가보면 안다고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곧, 익숙하게 둘이서 모이던 장소로 들어서자 석민이 입을 떡 벌렸다.
“여름꽃이야. 밤부터 해뜨기전까지만 피는 꽃인데, 딱 오늘 밤이 피는 날이었어.”
너한테 이걸 꼭 보여주고싶었어.
여름꽃은 여름에, 딱 이때만 피거든. 반짝거리는 꽃들사이에 서있는 민규의 얼굴에 웃음이가득했다.
“이거 여기서만 피는거야?”
“응, 야 솔직히 이런 꽃이 아무데서나 피면 난리날걸?”
아. 민규의 말에 석민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꽃들은 활짝핀채로 그 자태를 뽐내고있었다. 하긴 이런꽃들이 그냥 피어있으면, 남는게 없을게뻔했다. 그리고, 이렇게 피어있기에 더 소중하고 예쁜거겠지. 희소하기에 가치가 있고 꼭 그 자리에 있어야 돋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이꽃 꼭 이맘때쯤에만 피거든. 왠줄알아?”
민규의 표정은 똑같았다. 잔잔하게 빛나는 꽃들 사이에서, 나를 보는 올곧은 눈에, 석민은 꽃들을 구경하다가도 민규를 똑같이 쳐다봤다.
“이거, 이 산을 물려받게될 여우들이 결혼할 시기가 되면 펴.”
“…? 어? 뭐?”
“18살의 생일에 맞춰서, 결혼할 시기가 되면 여름날 밤에 펴. 항상 이맘때쯤이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선 청혼꽃이라고도 불려. 민규의 말에 자리에 앉아있던 석민이 벌떡 일어섰다. 청혼꽃, 청혼, 청… 미친.
“야, 너…”
“야, 이상한 생각하지마. 이거 보기 힘든거라서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오라고 한거야. 니가 지금 이때 아니면 죽을때까지 이런 꽃 언제봐. 그리고, 네 생각도…제대로 듣고싶고.”
그때 너무 경황이 없었잖아. 민규의 말에도 석민은 도저히 입을 열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쟤 때문에 머리가 터질거같은데. 오히려 민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해보였다. 떨리기는 한거야? 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나도 오글거리는 말은 잘 못해. 그래도…네가 좋아. 너는 나를 12년 동안 친구로만 봐왔겠지만…, 석민아. 좋아해.”
“…….”
“알아줬으면해서 말했고 그래서…나는 네 생각이 듣고싶어.”
조심스럽게 건네져오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괜히 어지럽던 생각이나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리고 그제야, 민규가 제대로 보였다. 자신과 조금떨어져서, 아무렇지 않아보이는게 아니라 잔뜩 긴장한, 귀가 조금 붉어지고 뒤에서 살랑거리던 꼬리가 경직된게, 뭔가 웃기고 귀여웠다. 아무렇지도 않은게 아니라, 긴장을 하고, 떨리고, 그래서 티가 잘 안 난거였다. 나보다 더 떨리고, 더 부끄러웠겠지.
보석처럼 빛나는 꽃들사이에서의 고백은 낭만적이다 못해 평생기억에 남을만큼 행복한것이겠지. 일주일이넘는 시간을 고민했던게 웃겼던 정도로 마음이 떨렸다. 괜히 웃음이 나고, 부끄런채, 긴장한채 서있는 민규에게로 조금 더 다가섰다. 손을 뻗어 손을 잡아채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너는, 네게 잊지못할 청혼을 했구나.
“민규야. 나는,”
어쩌면 그렇게 고민한게 무색할정도로, 나도 너를 좋아해. 그러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좋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이렇게 특별한 청혼을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테니까.
*
여름은 여우가 장가가는 날이었다. 축복하며 피어난 여름꽃들 사이로 장가를 가는 여우와, 검은색 면사포를 내려쓴 여우의 반려가 섰다. 검은색은 여우의 반려를 뜻하는 색으로 새로이 서로의 연을 잇고 나아가는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뜻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