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 내 <근친, 성행위 묘사>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 추천 BGM : Sufjan Stevens - Mystery of Love (From "Call Me By Your Name" Soundtrack)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행복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덕에 따라 탁월하게 발휘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행하는 목적으로서의 좋음, 그것이 위계를 가진다는 전제 하의 ‘최상의 좋음’이 행복이라고. 최상의, 완전한, 그러니까 완벽한 성취. 그것이야말로 정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그 말에 따르면 행복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극한의 감정에 속한다. 인간은 결함 하나 없이 톱니바퀴가 제 자리를 찾아들 듯 맞아떨어지고,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춘 상태가 되고 나서야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데. 사실 그건 영원히 이룰 수 없는 환상에 가까운 상태라 단언할 수 있다. 완벽한 삶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완벽이라는 건 대체 무엇으로부터 파생된 것일까. 완벽의 기준이 뭘까.
가질 수 없는 행복에 대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되뇌면 되뇔수록 행복이라는 단어는 점점 몸집을 더 키운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키우고, 또 불려서, 결코 품을 수 없는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하려고 애를 쓸수록 오히려 더 행복은 멀어지게 된다. 원래, 그런 법이다.
그게 내가 행복이라는 가치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그리고 구태여 행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이유다. 어차피 행복할 수 없으니까. 완벽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거고, 완벽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하니까. 가질 수 없는 행복을 좇으며 사느니, 소소한 만족감으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더 이로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미성숙한 우리의 여름
Oh! Summer!
권에이 씀
한 입 베어 문 자두가, 맛있다.
“맛있냐?”
김민규의 손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빈 책가방이 만드는 소리가 퍽 요란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꼭 그 짝이다. 공부도 좆도 못하면서, 필통은 꼭 요란한 철제 필통을 써선 몇 개 들지도 않은 펜 따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다. 입가에 흐르는 자두의 과즙을 한 번 빨아들인 석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삭아삭, 자두 껍질이 씹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팡, 하고 터져 나와 입가를 죄 얼룩지는 자두를 나는 꽤 좋아하는 편이다. 왜 맛있는 과일은 여름에 유독 많은 걸까. 수박도, 자두도, 복숭아도. 과즙이 줄줄 흘러 손이 끈적끈적 해져도 그걸 삼켜가며 먹는 과일이 제일 맛있는 법인데.
“너도 먹을래?”
“아니, 손 끈적끈적 해져서 싫어.”
“맛있는데.”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은 미적지근하고, 하나 밖에 없는 친아들은 아웃 오브 안중인 부모님 덕에 벌써 며칠째 비어버린 집은 김민규와 나의 천국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름휴가랍시고 잔뜩 들뜬 채 짐을 챙기던 엄마 모습이 떠올라 비식비식 웃음이 샌다. 이번엔 어디로 간다고 그랬지, 동남아였나?
사실 불만은 없었다. 엄마랑 아빠 틈에 끼어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며 체력을 소진하느니, 차라리 집에 박혀서 보충 수업이나 나가고 김민규랑 시시덕거리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보충 수업을 멋대로 빼먹어 담임이 집에 전활 한들 받을 엄마나 아빠가 없는 시간이 얼마나 금쪽같은 것들인데. 내가 그걸 포기할 수야 없지. 인위적인 에어컨 바람 하나 없이 후덥지근한 집이어도 소파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책을 보는 것이 좋고, 오금에 땀이 맺혀 축축해져도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넘어오는 매미 소리가 나는 좋으니까.
“에어컨 좀 켜면 안 되냐?”
“여름이잖아.”
땀으로 젖어 몸에 딱 붙은 교복 셔츠 자락을 펄럭이는 김민규 미간엔 주름이 잔뜩 진다. 종일 교실 에어컨 바람 아래에 있다가 왔으면서, 뭐가 그렇게 덥다고 에어컨 타령인지 모를 일이다. 매번 동문서답으로 싫다는 의사를 대신 표하는 나와, 그런 나의 의사는 귓등으로 흘려듣는 김민규. 활짝 열어둔 창문은 개의치 않고 에어컨을 켜는 손길엔 망설임이 없다. 콧잔등에 맺힌 땀을 훔쳐내고, 제 키만 한 에어컨 앞에 서서 눈을 지그시 감은 얼굴이 빚은 것처럼 가지런히 맞아떨어진다.
“에어컨 바람 싫은데.”
“잘 사는 집에서 아끼면 그게 더 죄야.”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열린 창문을 하나, 둘 닫는 석민의 입술이 불퉁히 튀어나온다. 며칠 전에 비하면 더운 것도 아닌데, 별 이상한 이유로 에어컨 켜는 걸 합리화하는 게 나는 불만이다. 김민규의 두꺼운 손가락 끝에서 교복 셔츠 단추들은 맥없이 제 자리를 잃는다. 키도 크고, 골격도 나보다 훨씬 커서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 없어 보이는 김민규는 유독 더위에 약한 편이라,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켜자고 난리법석이다. 여름의 김민규를 보고 있자면 마당에 내리쬐는 뙤약볕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 할머니네 똥강아지가 절로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에어컨을 끌어안을 것처럼 벌린 양 팔 하며, 땀에 젖어 축 늘어진 교복 셔츠 하며.
벌써 형형색색의 가방을 메고 다니던 시절을 지나, 입고 다니는 교복이 바뀔 정도로 오랜 시간을 김민규와 함께 보내었는데. 나는 늘 김민규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다. 타고난 성정이 꼼꼼하질 못한 탓에 김민규가 몇 번이나 꼬집어서 얘기했던 싫어하는 음식 같은 걸 기억해주지도 못하고, 표정을 아무리 읽으려고 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지금 어떤 기분인지 파악해주지를 못한다. 그냥 덥다고 하면 더운가 보다, 기분이 좋다고 하면 좋은가 보다, 하지.
그에 반해 김민규는 나에 대한 거라면 좀처럼 잊는 법이 없었다. 남들은 재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다고 학을 떼는 철학서를 좋아하는 것도, 여름이면 밥보다 과일을 더 많이 먹는다는 것도, 우리 집에 수저가 몇 쌍이 있는지, 그리고 내 방 책상에 자기랑 같이 찍은 사진이 몇 장이 올려져 있는지, 하는 것들까지.
“민규야.”
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은 말했다. 친구는 모든 것을 나눈다고.
“응.”
그 ‘모든 것’이라는 게, 나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끌어모은 감정 덩어리들도 전부 포함하는 걸까. 플라톤 선생님이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건, 물질적인 것들일까. 아니면 비물질적인 것까지 전부 포함한 것들일까.
“있잖아.”
그렇다면 나는 민규에게 모든 것을 나누고 있을까? 그게 물질적인 것들이든, 비물질적인 것들이든, 전부 나누고 있는 걸까?
“우리 친구지?”
접시 가득 담겨있던 자두가 하나 밖에 남질 않았다. 여전히 김민규는 나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서있고, 나는 다시 소파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던진 퀘스천 마크에 대한 마침표는 돌아오질 않는다. 우리가 친구인가?
“민규야.”
“응.”
“자두 먹을래?”
절레절레, 김민규의 잘생긴 머리통이 흔들린다. 마지막 남은 자두는 내 입 속으로 금방 자취를 감추고, 줄줄 흐르는 과즙이 다시 펼쳐 놓은 만화책 위로 뚝뚝 떨어진다. 회색조로 채색된 만화책이 방울방울 조금 더 짙어진다.
응, 우리는 친구야. 민규야, 우리 친구잖아.
내가 던진 퀘스천 마크에 대한 마침표는 언제나 내가 찍는다. 우리가 친구냐는 우스운 질문에, 민규는 항상 대답을 않고 못들은 체 한다. 관계를 정의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고 그걸 해내기엔 민규가 나보다 한 뼘 더 어린 걸지도 모른다. 나도 어린데, 민규는 나보다 꼭 한 뼘만큼 덜 자란 걸지도. 키는 나보다 한 뼘이나 더 큰데, 속은 한 뼘이나 작은 걸지도. 응, 그런 걸지도.
*
손가락 끝에 끈적끈적하게 묻은 과즙이 말라붙었다. 펼쳐둔 만화책에서도 달달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새콤달콤한 자두 냄새가 손에서 뻗어 나와 코를 간질인다. 이렇게 매일매일 만화책만 보고, 내가 좋아하는 책만 읽으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이 아닐까. 꼭 행복할 필요 없이 이 정도 만족감이라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아직 교복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거실 바닥에 길게 누운 김민규의 숨소리가 고르다. 나는 도통 저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다. 김민규는 항상 나를 다 아는 것처럼 굴고, 또 척척 내가 원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데 나는 왜 그러질 못할까.
“민규야, 자?”
“아니.”
“그럼 무슨 생각해?”
턱을 괴고 히죽히죽 웃어대는 석민을 민규가 몸을 반쯤 일으켜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썹 한 올까지 전부 핥는 것 같은 진득한 눈이 좋고, 꾹 다물린 입술이 좋다. 비죽 뻗은 덧니를 품고,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득 담은 김민규. 어떻게 저렇게 누군가 깎아 만든 것처럼 생겼을까, 민규는.
“담임이 내일은 꼭 너 데려오래.”
“나?”
“한 번만 더 맘대로 보충 째면 집에 전화한대.”
“전화 하라지.”
어차피 받을 사람도 없는 걸, 뭐. 만화책을 대충 바닥 아래로 던져둔 석민이 그대로 발라당, 소파 위에 드러눕는다. 아, 자두 더 먹고 싶다. 비어있는 속에 자꾸 새콤한 것만 집어넣으면 나중에 배앓이를 할 거라는 걸 다 알면서도 달콤한 냄새만 맡으면 침이 절로 고인다. 꼴깍, 한 모금 삼켜내면 커다란 자두 하나를 가득 베어 물고 싶어지고.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 손가락을 전부 다해도 부족할 정도가 됐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과일들이 많이 나는 계절이라는 거랑 창으로 넘어오는 매미 소리가 좋다는 거. 그리고 커튼을 흔드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좋고, 느릿하게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좋다. 또, 여름 방학 동안은 지긋지긋한 학교엘 나가지 않아도 되고. 음, 그리고….
“학교 째는 건 넌데 왜 내가 쿠사리를 먹냐?”
“음…, 왜냐면 민규는 나를 좋아하니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내 대답에 맞춰 돌아오는 건 김민규의 헛웃음이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바닥이랑 한 몸이 된 것처럼 등을 붙이는 모습은 눈에 익어 그려내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기다랗게 늘어진 몸뚱어리, 햇빛을 잔뜩 머금어 까무잡잡한 피부, 하얀 양말이 신겨진 두 발, 그리고 눈가에 얹은 탄탄한 팔뚝까지 전부.
“오직 남을 위해 산 인생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번엔 또 누군데.”
“아인슈타인.”
이번엔 석민의 눈이 감긴다. 천천히 들었다, 놓았다, 하는 눈꺼풀은 조금씩 무게를 더하고 늘어지는 숨소리가 낮게 깔린다. 그리고 여름은 낮잠 자기에 너무 좋은 계절이니까. 또, 또….
“근데 나는 나를 위해서 살래, 그게 더 가치 있는 거 같아.”
“부모님 오실 때까지 학교 안 가겠단 소리를 참 신박하게 한다, 너.”
“티 났어?”
흐흐, 석민의 웃음소리가 작게 울린다. 허리춤까지 올라간 티셔츠를 끌어내리려는 석민의 손 위로 어느새 다가온 민규의 손이 포개어졌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 따뜻한 김민규 손. 또 내가 여름을 왜 좋아했더라.
석민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민규가 티셔츠 속으로 두툼한 손을 밀어 넣었다.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아랫입술을 깨문 석민이 슬그머니 실눈을 뜬다. 바들바들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김민규의 잘생긴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가, 없어졌다가 한다. 자연스럽게 맞대는 맨살은 여름답게 빈틈 하나 없이 바짝 붙었다 떨어진다. 학교 갔다 와서 샤워도 안 했으면서, 땀도 뻘뻘 흘려놓고.
“할 거야?”
“응.”
아, 기억났다. 그리고 여름은, 미성숙해. 꼭 우리처럼.
*
그러니까, 나는 꼭 진부한 자소서 같은 삶을 살았다. 때로는 엄하시고, 때로는 다정하신 부모님 아래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난, 그런 삶. 경제적으론 오히려 풍족한 편이었고, 흔히 말하는 다이아수저까지는 아니어도 금수저 정도는 될 법한 가정에서 자랐으니까. 게다가 금슬 하나는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모님이었으니, 나는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삐딱선을 탈 이유도, 부모님 속을 썩일 이유도 없었고. 매일 가야 하는 학교는 지루하긴 해도 그럭저럭 다닐만했고, 나를 괴롭히는 이 하나 없는 평화로운 인생이었다.
그러다 김민규를 만났고, 김민규는 꼭 고요한 호수 같던 내 인생에 손톱만 한 조약돌 하나를 던졌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나의 특권이었으며, 누군가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나는 김민규를 통해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다음은, 이상한 감정 덩어리의 시작이었다. 내가 누리고 살았던 것들을 맛보지 못한 친구에 대한 연민이었던 건지, 아니면 진정 내가 김민규를 섹슈얼한 상대로 느끼고 있는 건지 모를 이상한 감정 덩어리. 김민규는 그저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 그 조약돌이 만들어낸 수면의 파동은 둥글게, 둥글게 지름을 점점 키웠다.
책임 전가는 쉬웠다. 김민규에게 엄한 생각을 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김민규와 몸을 맞대고 신음하는 나를 상상할 때마다, 나는 고요한 내 인생에 조약돌을 던진 김민규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처음으로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김민규와 내가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넘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모든 시작은 김민규였고, 얌전히 속에만 품어두었던 모든 것들을 꺼내도록 만든 건 김민규였으니 나는 잘못이 없다고. 민규가, 시작한 거라고.
“민규야.”
“응.”
“시작은 네가 한 거지, 그렇지?”
그렇잖아, 네가 한 거잖아. 가벼이 터뜨린 석민의 웃음소리가 잘게 흩어졌다. 내가 책임을 떠넘기면 김민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고개만 끄덕인다. 그게 정말 제 책임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지, 아니면 무어라 반응할 방법을 찾지 못해 은근슬쩍 넘겨버리는 건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김민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마음을 먹었고, 우리가 그어놓은 선 너머로 먼저 발을 내디딘 것은 김민규였다는 사실이 명백하니까.
맞닿은 시선은 뜨겁고, 짧은 옷가지가 가리지 못한 피부로 닿는 살결은 차갑다. 민규의 팔 언저리를 쓸어내린 석민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의 아슬아슬한 선은 꼭 운동장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하얀 선과 같아서, 누군가 발을 한 번만 잘못 디디면 지워지고 만다. 민규는 멋도 모르고 제가 지워버린 부분을 다시 덧그리고, 또 덧그리는데 나는 매번 그 선을 지우기 위해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시작은 김민규였지만, 그다음은 김민규가 아니었다. 민규는 우리가 그어놓은 선을 돌이키고 싶어 하는데, 나는 돌이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으응, 프로이트가 말했는데…,”
말려 올라간 티셔츠 탓에 드러난 뱃가죽 위로 인위적으로 차가운 기운이 닿았다. 금세 닿은 김민규의 숨결이 체온을 덥히는 동안, 나는 새카만 머리칼 사이를 손가락으로 비집고 헝클었다. 몸뚱어리를 헤집는 입술이, 뭉툭한 손가락 끝이 체온이 달아난 내 몸 위로 제 몫을 얹는다. 김민규가 닿은 모든 곳으로부터 피어오른 간지러운 느낌들은 한 곳으로 모여들어 힘을 더한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뭐라고 그랬냐면,
“Most people do not really want freedom,”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자유를 원하지 않는대.
“because freedom assumes responsibility,”
왜냐하면,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법이거든.
“and most people are afraid of that responsibility.”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책임을 두려워해.
“…like you.”
너처럼.
“아으, 민규야….”
머리털이 쭈뼛, 선다. 에어컨이 싫은 이유가 이거라니까. 꼭 냉장고 속에 내가 들어있는 것처럼, 차가운 음료수라도 된 것처럼 몸이 식어버려서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존재가 될 것 같단 말이야. 가쁜 숨은 아무리 고르려고 애를 써도 자꾸 차오르기만 하고, 제 머리맡으로 쏟아지는 내 숨소리는 아랑곳 않고 바쁘게 움직이는 김민규의 머리칼이 흔들린다. 입고 있던 반바지를 끌어내리고, 제 교복 바지 버클을 풀어낸다. 그런 다음엔 반쯤 선 제 것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단단히 세운다. 그 몸짓 하나하나가 김민규가 던지는 손톱만 한 조약돌이 되어 순식간에 욕정이 동한다.
아, 맞다. 그래서 내가 프로이트 얘기를 왜 했냐면,
“살살, 하윽, 풀어줘. 혀엉, 아파….”
“아, 씨발.”
꼭 우리 같잖아, 프로이트가 말한 그 사람들이. 책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엄마랑 아빠는 우리에게 자유를 줬는데, 우리는 실은 그걸 원하지 않는 거잖아. 우리가 이렇게 몸을 섞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두려우니까. 암만 배다른 형제라고 한들, 어쨌든 형제인 거니까. 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 시작은 형이 했고, 그다음은 나였을지언정 우리는 그 책임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니까. 그렇지, 응? 민규야, 그렇잖아. 형,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는 거잖아. 아니, 형이 두려워하고 있는 거잖아. 모든 것을 들켜버렸을 때, 내 몫까지 짊어져야 할 그 책임이 무서운 거잖아.
이름 대신 형이라는 호칭을 입에 올릴 때면 양심 어느 한구석이 쿡쿡 쑤시면서도, 그 호칭 앞에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김민규를 나는 너무 사랑한다. 부모님 앞에선 한없이 착하고 여린 아들, 그리고 가슴으로 낳은 소중한 아들이어야 하는 우리가 틀어지는 그 순간을 나는 너무 사랑하고 있다. 허리 아래는 바쁘게 움직이고, 입 속에 가두지 못한 신음 소리들은 말캉한 과육을 베어 물면 터져 나오는 과즙이라도 된 것처럼 팡팡 터진다.
“…우리, 으응, 친구잖아.”
형제가 아니라, 친구잖아. 우리는, 친구니까 이래도 되는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내가, 흣, 다 책임, 아! 질 거야, 아흑…!”
형이 두려워하는 그 책임, 내가 다 질게.
김민규의 눈이 지그시 감긴다.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순간이면 이성을 잃고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성질머리나, 학교에서 하는 행동거지만 봐도 결코 유순한 놈은 아닌데. 유독 그 책임 앞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갈팡질팡,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새가 날갯짓을 하듯, 그렇게. 정수리 한가운데를 조준해 떨어뜨린 조약돌 하나가 가장 아래 발바닥까지 푹, 하고 꺼진다. 작게 경련하는 조직 덩어리를 쓸고, 불순한 감정을 토해내는 중심부를 지나 발바닥까지 단숨에. 그 조약돌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곳이 가쁜 숨을 만들어내고,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치부를 들춘다. 차가운 바람을 만들어내는 에어컨은 여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김민규의 머리칼 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은 드러난 내 몸뚱어리 위로 뚝뚝 떨어진다.
“석민아.”
불덩이를 가득 품은 눈동자. 아니, 불안을 가득 품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꼭 별이라도 빼다 박은 것처럼 총명하게 빛을 내던 어린 날의 눈동자는 흐려진지 오래고, 나는 흐린 김민규의 눈동자를 사랑해마지않는다. 하얀 도화지 위에 먹물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리는 게 이런 느낌일까.
“우리가 친구야?”
민규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석민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다. 어깨를 들썩여가며 킥킥대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운다. 웃으면 안 되는데, 김민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 알고 있는데. 수십, 수백 번은 곱씹다 겨우 꺼내었을 물음일 텐데.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질 않아서, 마냥 웃음만 실실 샌다. 우리가 친구냐 묻는 김민규는 잘생긴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을 잔뜩 담고 있을까.
“우리가…, 형제야?”
“민규야.”
맞부딪힌 입술이 따뜻하다. 꽁꽁 얼어버릴 것 같은 에어컨 바람을 맞느라 서늘해진 내 입술 위로 포개어지는 김민규의 입술은 너무 따뜻해서, 꼭 아이스크림이 된 것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다. 말캉하게 섞이는 혓바닥은 조금 까칠까칠한 것 같으면서도 더없이 부드럽다.
“여름이잖아.”
나는 늘 김민규가 원하는 답을 한 번에 내어놓는 법이 없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마저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생긴 탓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 틀린 말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너무 마음 쓰지 마, 형이 두려워하는 그 책임은 내가 다 질게. 응,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