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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석민은 병든 닭마냥 기운이 없어 보였다. 확실히 여름이 되니까 더위를 많이 타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힘들어했다. 게다가 올해는 한번도 걸리지 않았던 냉방병에 걸려 일주일이 넘도록 학교에 나오질 못했다. 의외로 병치레가 잦은 민규와는 달리 석민은 제법 튼튼한 체질이라 한번 아프면 크게 앓았다.

 

 

 

 

 

 

 

REBOOT 上

오메가버스

 

 

 

 

 

 

 

보충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석민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이불을 칭칭 감고 있는 석민이 눈을 흘기며 문을 열어준다. 그냥 비번 누르고 들어오면 안 돼?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를 다 숨기질 못한다. 어차피 비번은 물론 방에 어떤 게 있는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다 아는 사이에 굳이 수고스럽게 누군지 확인을 거쳐 문을 열어주는 게 석민은 너무 귀찮았다. 그런 속내를 민규는 다 알고 있어서 일부러 벨 대신 큰 목소리로 ‘이석민’을 외쳐가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막상 들어가면 온 집안이 한기로 가득했다. 냉방병에 걸렸으면 더 따뜻하게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놨다.

 

 

“너 냉방병 걸린 건 맞아?”

 

 

식탁에 책가방을 올려놓고 챙겨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다가 석민에게 한대 맞았다. 아파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까 걱정이 돼서 찾아온 사람한테 다짜고짜 때리다니. 맞은 곳을 손으로 쓸며 옆을 쳐다보면 석민이 잔뜩 약이 올라 씩씩거린다.

 

 

“왜 시비야. 왜. 너 그럴 거면 나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미안. 이렇게 추우면 너 더 아플 거 같아서.”

“추운데 더워. 나도 미치겠다…”

 

 

석민이 한숨을 쉬며 민규에게 기댔다. 민규는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석민을 이끌고 소파로 데려갔다. 민규가 소파에 앉으면 석민이 민규에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야, 너 오늘 향수 뿌렸냐. 민규의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가 여태껏 맡아본 적 없던 생소한 향이었다. 집에서 쓰는 섬유유연제를 바꾼 건가. 좀 더 가까이 상체를 붙이고 목을 기울여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딘가 달짝지근하고 입에 머금어보고 싶은 그런 냄새가 났다.

 

 

“냄새가 난다고? 이상하네.”

“백퍼 너네 누나 향수 몰래 뿌린 거겠지.”

“자꾸 삐딱하게 나오면 팔 뺀다?”

“안 먹히는 협박질은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니, 민규야?”

“치…”

 

 

실내온도가 낮아서 추운지 민규가 기침을 한다. 석민은 한치의 틈도 없이 민규에게 바짝 붙어 혼자 쓰던 1인용 이불을 민규와 함께 덮었다. 몸이 차가운 걸 보니 제법 추웠던 모양인데 석민에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용케도 참았나 보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팔로 감고 있던 허리 부근을 살살 만져주니 민규가 간지럽다고 몸을 튼다.

 

 

“가만히 좀 있어.”

“니가 간지럽히니까 그렇지!”

“너 닭살 돋아서 그런 거거든?”

“몰라. 아, 치킨 먹고 싶다…”

 

 

하긴 점심도 안 먹고 바로 제 집에 왔을 테다. 보나마나 늦잠 잔다고 아침도 안 먹었을 거고, 쉬는 시간엔 엎드려 잔다고 매점도 안 갔을 거고. 여기 오겠다고 쓸데없이 뛰었을 테니 당연히 배가 고프겠지. 아무리 몸이 자라도 어렸을 때랑 똑같다. 어떤 목적이 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무식하게 달리는 거. 석민은 혀를 차며 어플로 주문을 했다.

 

 

“사오십분 걸린대.”

“이석민 사랑해…”

“우웩.”

“징그럽다고 토하는 시늉까지 하냐? 와 섭섭해. 진짜.”

“아니야. 나도 우리 밍구 사랑하지. 엄청.”

“우웨에엑.”

 

 

아무튼 김민규는 꼭 그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아예 화장실로 가세요, 김민규씨. 석민이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키며 발로는 민규를 툭툭 쳤다.

 

 

석민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거 보면 몸 상태도 점점 나아지는 것 같다. 민규는 요즘 맞벌이를 하는 석민의 부모를 대신에 석민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서로를 알아왔던 시간 동안, 석민이 이렇게까지 오래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마 석민은 모를 마음의 빚도 갖고 있었다. 민규가 발현통을 겪고 있었을 때, 민규가 그러했듯 석민 역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민규를 찾아왔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성과 이차 성징을 거치며 나타나는 또 다른 성.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베타.

 

 

중학교 2학년 여름, 민규는 알파 판정을 받았다. 자꾸 무릎이 아프고, 온 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아픈 게 단순히 키가 자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모든 게 발현을 거치며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 무렵엔 자주 어지럼증을 느끼는 민규를 위해 석민은 민규의 집에서 놀곤 했다. 애들이랑 PC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단 오히려 민규가 별 탈이 없는지 지켜보는 게 마음이 편했다. 민규는 철이 바뀔 때마다 감기에 걸렸고, 칠칠 맞게 돌아다니다 넘어져서 자주 다쳐서 민규를 떼어 놓고 다니는 게 불안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선 ‘야, 나 또 다쳤어. 나 피 나.’ 하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걸 듣고 싶진 않았다.

 

 

그날도 친구들에게 배신자란 소리를 들어가며 민규와 함께 집으로 갔다. 손발을 씻고, 민규의 옷장을 열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피자 두 판을 시켜 먹을 때까진 평소와 다름없었다. 석민아. 나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민규가 가슴을 두드리며 석민에게 물었다. 너 아까 급하게 먹어서 그런 거 아냐? 콜라 한 잔 더 마셔. 석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자 박스를 정리한 후, 소파에 앉아 케이블에서 틀어주는 액션 영화를 보다가 민규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갑자기 민규의 코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무심코 옆을 봤다가 피가 흐르는 걸 본 석민이 다급하게 휴지를 찾아 다녔다. 그때까지도 자동차가 질주하는 장면을 보느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민규가 석민에게 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냐고 잔소리를 하다가 자기 티셔츠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점점 빨갛게 적셔가는 셔츠 밑단을 멍하게 바라보다 석민이 제 목을 젖힐 때야 정신이 들었다.

 

 

민규야. 너 피가 안 멈춰. 어떡해?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 거라고 말했다.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석민은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었다.

 

 

내가 죽을 병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우냐.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들어올려보지만 손끝부터 저려왔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석민의 울음 소리가 더 커졌다. 민규는 산소가 모자란 것처럼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민규야! 제 이름을 부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석민을 본 것이 그날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15살. 남성. 알파. 민규를 표현하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다.

 

 

민규야. 우리 민규가 알파가 됐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조심할 게 더 많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해.

 

 

엄마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반 친구들이며, 동네 친구들이며 할 것 없이 소식을 들은 애들이 찾아와주는 게 더 좋았다.

 

 

엄마. 석민이는?

곧 올 거야. 석민이 엄마하고 통화했어.

 

 

머지않아 꽃다발을 든 석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왜 이제 왔어! 민규가 손을 흔들며 석민을 반겼다. 석민은 민규의 어머니께 먼저 인사를 드린 뒤, 침대 근처에 있는 간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태껏 들고 있던 노란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민규에게 내밀었다. 민규는 꽃다발에 코를 박고 잔뜩 향기를 들이마셨다.

 

 

향기 좋다. 고마워.

알파 된 거 축하해.

축하는 무슨…

애들이 그러던데 이제 너 이것보다 더 좋은 향기 맡을 수 있대. 너만 맡을 수 있는 거.

너도 맡을 수 있을 걸? 너도 곧 발현할 거잖아.

 

 

석민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2차 성징이 시작되면 머지않아 발현이 된다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나 석민에게만큼은 빗나갔다. 석민은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부모님께 듣기로는 어렸을 적 석민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받은 정밀 검사에서 평생 베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했단다. 애초부터 석민은 자신이 베타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들이 다 겪는 발현통 같은 건 겪을 일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민규가 고통스러워하는 것 역시 발현과는 연관하여 생각하지 못했다.

 

 

민규는 또래보다 조금 늦게 알파 성질이 나타난 편에 속했다. 그래서 석민 역시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규처럼 나도 언젠가는, 민규처럼.

 

 

민규와 같은 범위에 속하고 싶었다. 알파든 오메가든 뭐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무엇이라도 발현이 된다는 게 중요했다. 열다섯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가고 열여섯 봄이 찾아오고, 열여덟 여름이 될 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민규. 열여덟. 남성. 알파.

이석민. 열여덟. 남성. 베타.

 

 

석민은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베타였다.

 

 

 

 

 

 

 

**

 

 

 

 

 

 

 

알파는 오메가에게, 오메가는 알파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이것이 학회에서 밝힌 정설이었다. 그렇다면 베타가 알파에게 이끌리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민규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석민은 절망스러웠다. 알파인 민규가 베타인 저를 좋아할 확률은 없다는 것이니까.

 

 

지금도 민규는 오메가인 친구와 저에게 하듯이 손을 만지고, 어깨동무를 한다. 그럼 김민규는 생물학적으로 저 친구에게 끌려서 스킨십을 하는 걸까. 석민은 책상에 팔을 올려 그 위에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관계. 남들이 들으면 로맨틱하겠지.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운명적인 사랑. 그럼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저 사람과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관심 없는 척 행동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민규를 좇는다. 꽤나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지 환하게 웃는다. 난 하나도 재미없는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알파와 오메가가 사랑에 빠진다면 서로의 마음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야, 이석민! 앉아있지만 말고 같이 놀자!”

 

 

석민은 고개를 저으며 허리까지 내려온 담요를 다시 어깨에 두른다. 미간을 찌푸리며 석민을 쳐다보던 민규가 성큼성큼 다가와 석민의 옆에 앉았다.

 

 

“아직도 많이 추워?”

“아직은 쫌…”

“이 칠칠아. 이걸 이렇게 두르고 있음 어떡해.”

 

 

또 다시 내려가는 담요를 여미어 더 이상 내려가지 않도록 앞부분을 꽉 잡아맨다. 어휴. 이석민. 진짜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민규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석민은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정말 나 김민규 없으면 어떡하지. 쟤가 자꾸 좋아서 나 어떡하지. 다시 석민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석민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지금 느끼는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너무 훤히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민규는 일부러 콧소리를 내며 석민을 불렀다.

 

 

“야아, 석미나아. 내가 다른 애랑 논다고 삐졌어?”

 

 

석민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입술을 깨문다. 역시나 민규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쟤 지금 내가 다른 애랑 논다고 섭섭한 게 맞았다.

 

 

“지금 나 아파서 그렇거든? 야 귀찮아. 절로 가.”

“또 귀찮대. 넌 친구가 그렇게 귀찮냐? 어? 아주 올가미처럼 한번 꽁꽁 옭아줘?”

 

 

일부러 석민의 오른쪽 손에 제 왼손을 깍지 끼고,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움직임이 잠잠해진다.

 

 

“나 잘래. 너 가.”

“싫어. 나도 잘래.”

“그럼 그러던가.”

 

 

석민이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민규도 석민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뉘었다. 손을 풀려고 하길래 더 힘줘서 고쳐 잡는다. 석민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요즘 석민은 이상하다. 자꾸 아프고, 자꾸 달라붙다가 이내 떨어진다. 그리고 멀어진다. 다같이 어울려 놀지 않는다. 석민의 친구가 민규의 친구이고, 민규의 친구 역시 석민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민규야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하게 지낸다지만 석민은 조금씩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못내 섭섭했다. 같이 놀면 좋을 텐데. 아무리 투정 부려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하다. 그래도 저에겐 전과 다름없이 행동해야 하는데 왜 점점 벽을 치려는 건지 모르겠다. 답답했다. 예전엔 민규가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귓속말을 하면 말로는 징그럽다 하면서도 받아줬는데 지금은… 정말 징그러워서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떨어져있다가도 둘만 있을 때엔 먼저 민규를 껴안는다. 그때의 석민은 정말로 편안한 듯 몸에 힘을 빼고 기댄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이석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방금 전에도 석민과 관련해서 잔소리를 들었다. 너 이석민이랑 사겨? 민규는 일부러 더 크게 박장대소하며 대답했다. 내가? 쟤랑?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친구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민규를 빤히 쳐다봤다. 쟤한테서 네 냄새 나. 민규는 하마터면 헛기침을 할 뻔 했다. 일부러 더 고개를 빳빳하게 들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쟤랑 나랑 십 년 친구거든? 그 말을 듣던 친구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웃기고 있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제 입에서 나온 게 썩 먹힐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김민규도 이상하다. 제 냄새를 석민에게 묻혀놓고도 남들 앞에서 뻔뻔하게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말한다는 거 자체가 충분히 이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사람마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향이 존재한다. 세간에선 그걸 페로몬이라고 불렀다. 애석하게도 베타인 석민은 맡질 못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석민을 제외한 주위의 알파와 오메가는 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스스로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해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녔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석민이 받았다. 알파라는 착각과 더불어 의도치 않게 민규와 사귀는 사이라는 오해. 민규는 얼굴이 빨개졌고, 석민은 민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으며 앞으로 잘하라고 말했다.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묻힌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석민이 몰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석민과 가까이에 있으면 조절이 잘 안 된다. 몸을 붙이고 비비면서 더 진하게 묻혀놓는다. 마치 영역 표시를 하듯이.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이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게 골칫거리였다.

 

 

민규는 잠이 든 뒷모습을 보는 것 대신 석민처럼 똑같이 눈을 감았다. 맞잡은 두 손바닥에서 땀이 배었지만 종이 칠 때까지 한시도 놓지 않았다.

 

 

 

 

 

 

 

**

 

 

 

 

 

 

 

후드를 입고 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저번엔 에어컨 온도를 18도로 설정했는데도 후끈거릴 만큼 덥더니. 확실히 체온 조절이 잘 안 된다.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석민의 걱정은 나날이 쌓여갔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다리를 떨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석민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마음이 불안하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정신없이 필기를 하던 민규가 손에서 펜을 놓았다. 어쩔 수 없었다. 위로하듯이 허벅지를 살살 만져줘야 석민의 움직임이 멈추니까. 제 왼손으로 석민의 오른손을 꽉 잡아야 석민이 손톱을 깨물지 않으니까. 이럴 땐 왼손잡이인 게 불편했다. 진작 어른들 말씀을 듣고 오른손으로 교정했다면 필기와 감시 모두 완벽하게 해냈을 텐데.

 

 

맞잡은 석민의 손이 유난히 뜨겁다. 손바닥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괜찮어?”

 

 

또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에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석민에게 속삭였다. 석민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동시에 여러 번 기침을 내뱉었다.

 

 

“거짓말쟁이.”

“공부나 해.”

“싫-어.”

“손 놔.”

“그것도 싫-어.”

“뭐야 진짜...”

“싫-어. 싫-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놀리는 민규의 얼굴을 살짝 밀었다가 되려 손목이 잡혀버렸다. 민규의 표정이 점점 오묘해진다.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기도 전에 민규가 석민을 가리키며 보건실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석민을 슬쩍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선 민규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보건실에 끌려갔다.

 

 

민규의 표정이 풀리지가 않는다. 오히려 더 굳어졌다. 석민을 대신해 이름과 번호를 적고 다짜고짜 한숨부터 쉰다. 석민은 뒷목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쟤가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석민. 넌 아프면 양호실에 가야지 왜 교실에 있어.”

“그렇게까지 막 아프진 않아.”

“너 아파서 머리가 돌아버린 거 같아. 니 손목 한번 니가 만져봐.”

 

 

아무리 만져 봐도 수업을 포기하고 양호실에 가야 할 만큼 차갑거나 뜨겁진 않았다. 아무래도 익숙해져서 큰 차이를 못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민규가 이렇게 말을 할 정도면 제 몸 상태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원 갈게.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라.”

“너 꼭 병원 가. 아니다, 나랑 같이 가자.”

“뭘 또 같이 가. 내가 애냐? 혼자 갈 수 있거든?”

“진짜 너… 어휴. 내가 쌤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종 칠 때까지 푹 자. 아니다, 너 그냥 계속 자라. 너는 안정이 필요해.”

 

 

일부러 석민이 말하지 못하게 제 할 말만 했다. 석민을 침대에 눕히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씌우고, 제 손으로 두 눈을 가려버렸다. 야, 너 눈 떴다 감았다 하는 거 다 느껴지거든? 민규의 지적을 듣고서야 석민이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이렇게 해 봤자 잠들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민규는 머뭇거리다 아주 조금 제 페로몬을 드러냈다. 석민이 좋다고 하던 그 냄새. 금세 석민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민규도 소리 없이 방긋 웃었다.

 

 

“석민아. 자?”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자면 가만히 있고, 안자면 눈 깜박여 봐.”

 

 

여전히 조용하다. 이석민. 석민아. 일부러 떠보려고 이름을 불러보지만 편안한 숨소리만 들린다. 이번엔 정말로 잠이 든 모양이다. 석민의 눈을 가리던 손을 떼어내자 석민은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민규는 벽을 보고 웅크리며 자는 석민에게 시선을 둔 채 방금 전 일을 곱씹어본다. 점점 예민해지는 제 스스로와 슬쩍 흘린 페로몬에 반응하는 이석민. 참 이상한 일인데 익숙해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김민규. 붙잡았던 손목의 체온. 여름이라기엔 비정상적인 뜨거움. 점점 복잡해지는 머릿속. 어쩌면… 혹시 몰라 기대하게 되는 설렘과 불안감. 민규는 의자에서 일어나 땀이 맺힌 석민의 뒷목을 살살 쓸어 내렸다. 땀에서 페로몬이 가장 잘 퍼진다는 말은 역시 베타에겐 통하지 않는다. 역시나 석민에게선 아무런 향도 나질 않는다. 오히려 민규의 몸에서 페로몬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체 내가 뭘 바라고 있던 거지. 석민이 깨기 전에 서둘러 손을 거뒀다. 민규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팔뚝에 피가 날 때까지 제 손톱으로 세게 꼬집었다. 제 감정도, 그 무엇도 마음대로 제어가 안 된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친다. 수업 안 들어왔다고 또 욕먹겠네. 민규는 제 머리카락을 헝클리며 다른 애들이 들어오기 전에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석민이 눈을 떴다. 갑자기 숨도 못 쉬게 꽉꽉 에워싸는 향 때문에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쉴 새 없이 콜록거렸다. 보건실에 들어오는 애들이 두어마디씩 욕을 한다. 어느 미친놈이 이 지랄을 해놨어? 곧이어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석민은 몸을 숨기려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복도까지 장난 아니야.”

“진짜 이거 미친 새끼 아니냐? 지 냄새를 범벅으로 묻혀놓고 튀어?”

“존나 역겹다. 아 씨발 문이랑 창문 다 열어.”

 

 

 

 

 

 

 

**

 

 

 

 

 

 

 

“방학 동안 아무 탈 없이, 사고 치지 말고, 무사히 보자.”

 

 

지긋지긋한 보충수업이 드디어 끝났다.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애들이 교실을 뛰쳐나간다. 석민은 흘러내린 가디건을 올려 입고 친구들과 말하기 바쁜 민규를 뒷문에서 기다렸다. 민규는 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은지 아직 가방도 다 못 챙겼다.

 

 

오늘은 일주일 남은 진짜 방학이 시작되는 기념으로 민규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병원부터 들려야 했지만. 민규가 뿌린 페로몬 때문에 괴로웠던 그 날, 부모님께 말해 이튿날에 바로 검진 예약을 했다. 부모님이 생각하기에도 석민의 상태가 단순히 냉방병으로 정의하기엔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막상 혼자 가려니 괜히 무서워서 민규에게 영화를 보여줄 테니 같이 가자고 졸랐다. 혼자 간다더니 왜 같이 가자 하냐고 놀릴 거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민규는 알겠다는 말만 했다.

 

 

“이석민! 이제 가자!”

 

 

민규가 얼른 뛰어와 석민의 어깨에 매달렸다. 늦어서 미안. 석민이 짜증을 부리기 전에 미리 사과로 입막음부터 한다. 아주 얄미워죽겠어, 진짜. 민규는 히히 웃으며 석민을 꼭 껴안았다. 순간, 석민의 뒷목에 소름이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민규를 밀치고 말았다.

 

 

넘어진 민규도, 밀어뜨린 석민도 멍청하게 서로를 쳐다봤다. 민규가 먼저 일어서서 아무렇지 않게 석민을 툭 쳤다. 얼른 가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석민은 미안하단 말도 못하고 앞서 간 민규를 뒤따라갔다.

 

 

 

 

 

본관을 나서는 그때부터 숨이 턱 막힐 만큼 지독하게 더웠다. 휴대용 선풍기로 아무리 얼굴을 식혀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마부터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가며 걸어갔다. 아까 전부터 말이 없던 민규가 갑자기 멈춰 섰다. 우리 택시 타고 가자. 석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를 기다리는 내내 민규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석민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다 누군가 근처에 오기만 하면 석민의 손을 잡았다. 아귀 힘이 너무 강해서 손을 빼려 해도 놓아주질 않았다. 참다못해 발을 밟았다. 그러면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핏발이 선 눈으로 석민을 노려봤다. 시선이 잠시 석민에게 머물다 다른 사람들로 향했다. 석민은 침만 삼킨 채 침묵했다.

 

 

어디 가세요? 택시 기사가 묻는다. 이번에도 민규가 빨랐다. 행선지는 병원이 아닌 민규의 집으로 향했다. 석민은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감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만 어긋나도 무슨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금방 집 앞에 도착했다. 석민은 당장이라도 뛰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렸다. 민규가 먼저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겠다고.

 

 

“석민아.”

 

 

그러나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석민은 발을 뗄 수 없었다. 너 정말 베타 맞지. 다시금 형질을 확인하는 민규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렸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

“너 베타지. 맞잖아. 그치?”

“그걸 왜 묻냐고!”

“맞다고 해주면 안 돼?”

“김민규, 너 진짜 미쳤냐?”

“제발…”

 

 

이유도 모르고 민규가 원하는 대로 대답했다. 나 베타 맞아. 이 땡볕 아래에서 대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작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날을 세우며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또 한번 더 이상한 질문을 하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작정이었다.

 

 

민규가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민규는 제 손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석민의 이마부터 볼을 지나, 턱을 거쳐, 목젖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주 가벼운 접촉에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향이 스멀스멀 퍼져간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몸 속 가득히 그 향이 스며든다. 민규는 확신했다. 김민규는 알고, 이석민은 모른다.

 

 

“석민아.”

 

 

툭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주 오묘한 표정으로 석민을 불렀다.

 

 

“나한테서 냄새 안 나?”

“무슨…”

 

 

저번에 맡아본 적 있는 향이다. 달짝지근하고 입에 머금어보고 싶은 향. 어디서 맡았더라… 석민이 정답을 알아내기도 전에 그 향이 어지러울 정도로 단숨에 밀려 들어온다. 코가 시큰거렸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코 주위를 훔쳤더니 피가 묻어있다.

 

 

“민규야, 대체 이게… 이게 뭐야?”

 

 

향 때문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당장 눈앞에 있는 민규의 팔뚝을 움켜쥐고 간신히 버텨냈다.

 

 

“석민아. 너한테서 냄새가 나.”

“…땀, 냄새…?”

“아니.”

“그러면 뭔데…”

“내가 좋아하는 냄새.”

“농담하지 마…”

“아니야. 진짜야.”

 

 

민규가 끅끅거리며 웃는다. 석민도 따라 웃었다. 아, 김민규가 좋다고 한다. 좋다는 그 한마디에 석민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점점 눈앞이 흐려진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사인을 논하라고 한다면.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전부 다 김민규 때문이라고.

 

 

“나 용서하지 마.”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당겨지면서 몸을 마비시키는 향이 입안 가득 밀려든다. 제 머리카락을 헤집는 민규의 손이 느껴진다. 석민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절대 일어날 리 없는 한여름 밤의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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