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자몽
(하편은 개인 홈에 따로 기제 될 예정입니다.)
별빛이 잔뜩 수놓은 여름 밤 하늘을 바라보며 민규는 제 품에 안겨있는 석민을 끌어안았다. 배시시 웃는 석민의 웃음소리가 민규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말 간지러워서 피식 웃은 건지, 아님 이석민이 옆에 있어서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김민규는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연인과 함께 맞이하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밤하늘.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부드럽고 시원한 향이 석민을 끌어안은 민규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기롭고 익숙한 향. 석민의 샴푸 향은 어느 새 민규에게도 옮겨갔다. 새근새근 잠이 든 석민은 꿈속에서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배시시 웃고 있다. 제 품에 안긴 석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락방의 천장을 하늘이 훤히 보이게 잘 해놓았다는 생각을 한 민규였다.
이제 갓 1년차 부부가 된 두 사람의 신혼 365일이 저무는 로맨틱한 밤이었다.
“석민아, 아침 먹자.”
졸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은 석민은 익숙하게 민규가 차린 아침을 오물오물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민규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열일곱의 김민규가 열일곱의 이석민에게 수줍게 고백하던 그 날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날이었다. 새빨갛게 물든 귀와 수줍은 듯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소꿉친구였던 지난 17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때의 수줍어했던 열일곱의 김민규와 지금 앞에서 자신이 만든 요리를 감탄하며 먹는 서른 살의 김민규는 달라졌을까? ...아닌 것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보다 더 완벽하게 잘생겨진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달짝지근한 일본식 계란말이를 앙, 하고 베어 문 석민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웃는 민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입맛 없어?”
“더워. 에어컨이라도 틀자.”
“누진세...!”
“다 넘어가지만 더위만큼은 못 넘겨. 비도 안 오니까 더위만 계속 오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니.
아침부터 더위에 지친 석민이 못 참고 에어컨을 틀자 전기료 누진세가 나간다며 잔소리를 하려던 민규의 표정이 구겨졌다. 석민은 민규가 잔소리 할까봐 바로 에어컨을 틀고 식탁에 앉았다. 집 안이 시원해지자 김민규가 가장 좋아하는 이석민의 예쁜 웃음을 짓고 밥을 먹는 연인을 보며, 민규도 같이 웃었다.
아무렴 어때. 네가 좋다면 다 좋은 거지.
“여보, 민규야.”
“보고 싶어도 참아.”
“보고 싶을 틈이 없을 거 같아.”
“왜?”
민규의 넥타이를 익숙하게 메어 준 석민은 배시시 웃었다. 수줍게 지은 미소가 민규의 눈앞에 아른아른 거렸다. 석민의 볼을 살짝 잡아당긴 민규는 제 볼을 감싸며 부루퉁한 얼굴의 석민에게 물었다.
왜, 내가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푸우, 한숨을 내쉰 석민은 민규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일은 많은데, 민규는 보고 싶고. 하지만 자택근무도 쉬운 일은 아니기에 석민은 민규가 출근하면 그때부터 달라진다. 김민규에게만 보여준 수줍은 미소, 상큼한 웃음 같은 예쁜 것들은 다 사라지고 결혼 이후 자택근무를 선택한 이 팀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도 여행가고 싶어.”
“가자, 여행.”
“서명호가 맨날 카톡으로 자랑하잖아. 자기 애인이랑 여행 갔다고.”
“우리도 여행 가면 되지.”
“우리 바쁘잖아...”
연차가 있다고 조금 편해졌다하지만 여전히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민규의 미간을 쓱쓱 문지른 석민은 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환히 웃는 석민의 얼굴을 본 민규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랑하는 연인을 껴안았다.
민규가 출근한 후, 혼자 남아 자택근무를 시작한 석민은 생각이 있어 보이는 민규의 표정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뭔가 좀 찜찜한데 이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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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고 싶다는 말을 한 후, 김민규는 이상해졌다. 같이 있어도 멍 때리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민규를 불러봤지만 듣지도 않았다. 직접 가서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반응하는 민규를 보며 석민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숨기는 게 뭐야, 김민규. 말해봐.
자신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방으로 들어간 민규의 뒷모습에 당황한 석민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얼었다. 이런 거 믿고 싶지 않지만 설마... 그래도 김민규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데. 5년이면 충분히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됐었지만 민규는 석민을 기다렸다. 열일곱의 어느 더운 여름 날, 석민은 수줍은 얼굴로 제게 고백하는 열일곱의 김민규의 고백을 거절했었다. 그 후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아니, 이제 와서 생각하건데 자신만 그랬다. 민규는 소꿉친구이자 제 첫사랑인 석민에게 거절당한 후 그를 조금 멀리했었으니까.
“이거.”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민규가 석민에게 내민 건 비행기 표였다. 멍한 표정으로 민규를 보자 귀엽다는 듯 석민의 볼을 살짝 꼬집은 민규가 말했다. 그것도 엄청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들뜬 채.
“이왕이면 서명호가 갔던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
“......”
“휴가도 받았어. 안될 거 같았는데 분위기 보고 눈치껏 말했더니 됐어.”
“... 진짜?”
“응. 3박 4일로 여행 갔다 오고, 나머지 3일은 너랑 집에서 쉬어야지.”
“뭐야. 일주일이나 쉬어?”
“네 남편 능력 좋거든? 저번에 안 쓴 연차까지 이번에 다 쓴 거야. 이것 때문에 고생 좀 했다. 어때?”
“완전 좋아! 김민규 진짜 최고야.”
“그렇지. 그런 김민규가 누구 꺼?”
“내꺼!”
해맑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민규의 품에 안긴 석민은 제 손에 쥐어진 비행기 표를 보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여행. 작년에 신혼여행도 다녀왔지만 민규와 여름휴가를 꼭 가보고 싶었기에 정말 행복했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웃으며 석민을 쳐다본 민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여서 참 다행이라고.
휴가 첫날, 부지런히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바로 바닷가로 간 둘은, 4일내내 바닷가에서 머무르며 바다의 풍경을 맘껏 감상했다. 관광 목적이 아닌, 단순한 힐링의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다 정말 예뻐.”
푸른 바다 빛깔을 보며 예쁘게 웃는 석민의 모습이 민규의 카메라 앵글에 잡혔다. 씩, 웃으며 석민을 카메라에 소중하고 예쁘게 담은 뒤 그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청량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석민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민규의 옆으로 다가 온 석민은 조금 전 민규가 찍은 제 모습을 보며 웃었다.
“우와, 진짜 예뻐.”
“네가 더 예뻐.”
네가 더 예쁘다는 민규의 말에 귓불이 붉어진 석민은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 석민이 귀여워 피식 웃은 민규는 다시 카메라에 시선을 옮겼다. 푸른 바다와 함께 예쁜 석민을 두고두고 보고 싶었던 민규는 여행 둘째 날, 시도 때도 없이 석민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모래 위를 침범하는 파도를 보고 있던 석민은 제 옆에 있던 민규의 손을 꽉 잡았다. 갑작스런 석민의 행동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맞잡은 손은 더운 여름에도 한없이 따스하고 좋았다.
햇빛이 강한 오후엔 두 사람의 어린 추억이 서려있는 성산 일출봉으로 향했다. 이곳이 어떤 곳이냐면, 열일곱 살의 풋풋했던 두 사람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점심을 힘차게 먹고 햇볕 따가운 오후에 성산 일출봉을 오르라는 학교가 원망스러웠지만 네 사람은 늦게 올라오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걸로 내기를 걸고 올라갔었다. 그때는 무슨 힘으로 이곳을 올라갔을까. 아련한 옛 추억에 잠긴 석민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울어?”
“아니. 우리 고등학생때 기억 나?”
“여기서 아이스크림 내기 했잖아.”
“기억하네?”
“응. 그때 네가 져서 내가 돈 대신 내줬잖아.”
“진짜? 난 내가 계산 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너 그때 지갑 숙소에 두고 왔다고 나한테 돈 빌려갔었어.”
“헐... 미안해, 민규야.”
“이미 지난 일인데 뭘.”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민규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남자가 힙시트로 아기를 안고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부러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민규의 옆모습을 보며 석민은 생각에 잠겼다.
늦은 오후, 성산 일출봉을 출발해 숙소로 향한 두 사람은 자신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승관에게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합류했다. 어디를 다녀왔냐고 묻는 승관과, 성산 일출봉에 가서 수학 여행 때 걸었던 내기를 말하는 석민을 보며 미소 지은 민규는 아까 그 남자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를 안고 있는 그 남자가 부러웠다.
“그 날 김민규가 아이스크림 값 계산했잖아.”
“진짜였구나.”
“너 그거 아직도 안 갚았냐? 벌써 몇 년 된 거야?”
“다음 달 용돈을 그만큼 더 줘야겠다.”
“뭐야. 김민규 용돈 타?”
“이 분이 우리 집 재정관리 하셔.”
석민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올린 민규는 그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제 쪽으로 석민을 이끄는 김민규와, 자연스럽게 민규의 품으로 가는 이석민을 보며 승관은 닭살이 돋았다.
“부승관. 나 커피.”
“그래. 기다려 봐.”
“산책 갈까?”
“산책?”
“야, 산책 갈 거면 여기 앞에 해변도로 걸어. 달빛도 예뻐.”
승관이 추천한 해변도로를 걷는 두 사람은 조용했다. 어색한 기분에 괜히 깍지 낀 민규의 손을 앙, 무는 시늉을 했다가 혼난 석민은 한층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한숨을 쉬었다. 이 어색함이 어디서 오는 어색함인지 알고 있기에 한숨만 계속 나왔다. 한참을 걷다가 밝은 달빛에 멈춰선 민규는 깍지 껴서 잡고 있던 석민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그런 민규의 행동에 석민은 달빛에 반쯤 가려진 민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름 밤 바닷바람은, 밤인데도 후덥지근했다.
“소원 빌래.”
“뭐?”
“달에 소원 빌 거야.”
“어... 응, 그래.”
“너는?”
“나도 빌어야지.”
달님에 제 소원을 빌다가 옆에서 두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비는 석민의 모습이 예뻐 한참을 쳐다보았다. 눈을 뜬 석민과 시선이 마주치자, 민규는 달빛에 환히 보인 석민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김민규. 안 참아도 돼.”
그 말을 시작으로 이어진 달빛 아래의 키스는 석민의 기분을 붕 뜨게 했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낮부터 심란했던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답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하려던 찰나, 민규가 먼저 고백한 말에 석민은 애써 무덤덤한 척 했다.
“내 소원, 우리 아이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
“......”
“예쁜 딸, 잘생긴 아들 상관없으니까 너 닮은 우리 아이. 내가 조금 더 욕심 부려도 될까?”
“응.”
애써 침착한 척하며 대답한 석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석민의 손을 감싸 쥔 민규는 짧게 입을 맞추고 난 뒤 석민을 품에 안았다. 달빛 아래, 이제 막 부부가 된지 370일 된 두 사람을 달빛이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었다.
“민규야.”
“왜?”
“그 여름 날, 나 좋다고 해줘서 고마워.”
“갑자기?”
“응. 그 날 아니었으면 내 인생에서 넌 영원히 없었을걸.”
“과거의 내가 잘했네.”
“더워. 얼른 들어가자.”
“미리 에어컨 틀어놓으라고 부승관에게 문자 보낼까?”
“그러지마. 승관이 지금 애인이랑 통화 하느라 바쁠걸?”
“그걸 어떻게 알아?”
“저기. 부승관 보이잖아. 쟤 요즘 연애하느라 정신없거든.”
“허어.”
석민의 손끝이 향한 곳은 통화를 하고 있는 승관이었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간 두 사람은, 바로 에어컨을 틀며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시원한 숙소가 최고라며 좋아하는 석민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민규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데굴데굴 굴러서 민규의 품에 안착한 석민은 익숙하고 포근한 품에 서 눈을 감았다.
“다음엔 둘이 아닌 셋이서 오자.”
“응.”
“그리고 잘 자. 좋은 꿈 꿔.”
“으응...”
무더운 여름 날, 여행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