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규겸 합작 ‘여름’ ; 첫사랑의 유효기간. 후추.

 

부서짐 없이 창문을 뚫고 온전하게 들어오는 햇볕이 제법 세서 나는 책상 위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몸을 좀비처럼 흐느적대며 굼뜨게 일으켰다.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귀에 닿는 모든 소리가 웅웅거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깬 터라 시야가 흐릿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팍 찡그려 시간을 확인하니 1교시 쉬는 시간이다. 책상에 엎어져 눈을 감은 게 8시 조례가 막 끝난 후였는데 고작 두 시간밖에 안 지났다니. 나는 다시 책상에 드러누워 뭉툭한 손가락 두어 개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이게 다 여름이라서 그렇다. 햇빛을 더 강하게 발산하려고 태양이 내 기운을 쪽쪽 빨아들이는 거고, 그래서 땀도 줄줄 흘리는 거고. 아무튼, 요지는 여름의 열기로 내 정신도 만만찮게 흐물거렸다는 거다. 언제 고장이 났는지 블라인드도 뚝 떼어져 있는 데다 하필 자리도 운동장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창문 쪽 자리여서 나는 여름이 봄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위풍당당 군림했다는 걸 요즘 들어 부쩍 실감하곤 했다.

 

“우유 가져왔다!”

 

시계를 쳐다보니 쉬는 시간이 어림잡아 3분쯤 남았다. 옆자리는 텅 비어있고, 칠판 아래에 구멍이 숭숭 뚫린 초록색 우유 박스가 없는 거로 봐선 이때쯤이면 올 때가 되었다. 타이밍 좋게 앞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렇게 문을 세게 열어젖히는 사람은 우리 반 우유 당번 이석민밖에 없다. 양손으로 박스를 들고 뒤뚱뒤뚱 걷는 걸음걸이가 퍽 불량스러웠다. 교실 전체를 다 잡아먹고도 남을 목소리로 우유 가져가라고 외치던 그가 쿵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우유가 가득 든 박스를 던지듯이 내려놓는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는 걸 보니 아마 오늘도 1교시 전에 가져오는 걸 깜빡하고 있다가 누군가 귀띔을 해줘서 부랴부랴 급식실까지 내려갔다 온 게 틀림없다. (이석민은 열에 아홉 번을 그래서 이젠 다들 그러려니 넘어간다) 나는 비스듬히 꺾여있던 허리를 곧게 세우고 분단 사이로 고개를 쭉 뺐다. 몇 번을 접었다가 폈는지 잔뜩 우그러진 종이 한 장과 두꺼운 유성 매직을 쥔 석민이 먼지가 덩어리져 나뒹구는 바닥에 궁둥이를 붙였다. 나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우유 하나를 집어 번호를 쓰는가 싶더니 귀찮았는지 이마를 긁적이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우는 소리를 낸다.

 

“아, 좀 너네가 알아서 가져가. 우유 들고 3층까지 올라오는 거 존나 힘들단 말이야.”

 

그럼 그렇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 주제에 유난은. 그 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부러진 샤프심이 의자 다리 밑에 깔렸기라도 했는지 옆집 삼색 고양이 털빛 같은 베이지색 바닥에 못생기게 줄이 남았다. 나는 이석민이 우유 당번 일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우유도 싫어하면서 대체 왜 우유 당번을 자처했는지는 뭐, 본인만 알겠지.

 

“김민규. 여기.”

 

한 자세로 잤더니 뻐근한 어깨만 좀 풀고 우유를 가지러 칠판 밑에 덩그러니 놓인 박스 쪽으로 가려는데 나보다 조금 더 작은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와서 흠칫 놀랐다. 씨, 까지만 튀어나온 목소리가 제동을 걸었다가 이석민? 하고 높게 붕 떴다. 우유 급식을 신청한 애들 이름이 적힌 종이를 팔랑대며 1분단과 2분단 사이의 가방들을 꾸역꾸역 헤치고 맨 뒷줄까지 들어온 석민이 나를 막아선 거였다. 분명 제 친구들과 대거리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몸놀림이 생각 외로 빠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체육 시간에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허우적대던 거랑은 별개인가. 아, 그런데 얘는 우유도 안 마시면서 왜 가져왔지. 따위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유를 퍽 내미는 행동에 나는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멀뚱멀뚱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으니 석민이 눈썹 끄트머리를 슬쩍 매만지면서 한 번 더 우유를 내밀었다.

 

“안 받아?”

“네 거 아니야?”

“아니. 네 거 가져온 건데.”

“…왜?”

“짝꿍이잖아.”

 

그리고 나 우유 신청 안 했어. 짝꿍이 그것도 모르냐? 아니. 아는데. 그 한마디 말하는 게 뭐 대수라고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다 고작 한 말이 미안, 이었다. 하여튼 김민규, 주변에 관심 좀 가져라. 짜증을 내는 건지 투덜대는 건지 모를 말투로 가슴팍에 우유를 퍽 들이밀기에 얼결에 두 손으로 받아들고 그를 따라 얌전히 내 자리에 앉았다. 사실 나는 이석민이 우유 급식을 신청하지 않은 것도 알고, 흰 우유는 질색하는 주제에 밍숭맹숭해서 맛대가리 하나 없는 초코우유나 딸기우유가 나오는 날이면 저기 4분단 끝에 몰려있는 친구들에게 달려가 우유를 뺏어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1분단 제일 끝줄 고정인 김민규가 짝꿍인 이석민과 농담 따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야. 민규야.”

“어. 왜.”

“너 오늘 초코, 그거 하나만 나 주면 안 돼?”

 

그런데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는 너는 꼭 우리가 친한 것처럼 군다. 아니, 우유가 두 개나 있길래. 싫으면 말고. 아쉽다는 듯 초코우유에서 시들시들 떨어지는 시선이 퍽 애처롭다. 초코우유 먹고 싶은데…. 또 초코를 항상 쪼꼬라고 말하지. 그게 귀여워 보이려고 그러는 건지, 그냥 원래 그래 왔던 건지는 모른다. 알았다면 이석민과 내가 농담 따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다시 말해, 아까 당당하게 이것저것 안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나는 이석민에 대해서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소리다. 매점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거 엄청나게 힘든 거 알지, 민규야. 웅얼웅얼 지하에 있는 매점에서부터 3층까지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일말의 희망을 칠한 눈으로 내게 몸을 붙여오는 석민과 우유를 번갈아 보다가, 나는 그의 책상 쪽으로 우유를 슥 밀었다. 애매한 책상 높낮이 차이에 잠깐 브레이크를 밟은 우유가 낙서만 가득한 교과서 위로 폭 넘어졌다.

 

“역시 짝꿍밖에 없네.”

 

손에 쥔 유성 매직으로 우유갑 위에 삐뚤빼뚤 이석민이라고 적어넣는 입꼬리부터 싱글벙글 신이 났다. 그 손에, 팔뚝에, 빳빳한 교복 셔츠에 충돌하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주먹을 말아쥐니 손바닥에 닿는 바짝 깎은 손톱 끝이 까끌까끌하다. 햇볕이 따갑게도 내리쬐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벌겋게 열이 오르는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이러고 있으면 눈은 조금 시려도 햇볕에 얼굴이 뜨거워져서 그렇다고 변명이라도 댈 수 있을 테니까. 이석민에 대해 모르는 것이 한가득해도 나는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열여덟의 김민규는 열여덟의 이석민을 좋아한다는 것을.

 

 

 

***

 

 

 

아, 죽겠다. 점심 먹은 게 아직 다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미친 듯이 뛰니 속이 쓰리다 못해 아팠다. 울렁거리는 위장도 문제지만 찜통에 던져진 것처럼 더워서 점점 속도가 줄었다. 제발 날씨 좀 생각하고 코스 돌리라니까. 오후 훈련은 체육관 안에서 하면 좀 좋냐구요. 하지만 헉헉대며 뛰고 있는 나는 대놓고 말할 용기도 없거니와 고작 선수 1에 불과하므로 속으로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외쳤다. 인간적으로 오늘 같은 날 야외 훈련은 말도 안 되고, 코치님은 진짜 나를 괴롭히기 위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아닐까… 아, 나 뭐라는 거야.

 

얼굴이 희끄무레하게 뜰 정도로 선크림을 발라도 시커멓게 타는데 이젠 정수리까지 따갑다. 내 머리 위에서 계란후라이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나는 만두야. 태양에 찐 만두... 마침 나를 지나쳐가던 원우 형이 너 더위 먹었냐? 하고 물어왔다. 정말 더위라도 먹었는가 보다. 사람이 더우면 아무 말이나 두서없이 튀어나온다는 걸 오늘에서야 몸소 깨달았다. 나 이러다 진짜 죽겠어. 햇볕이 제일 강하게 내리쬐는 시간대는 코치님도 무리였는지 결국 훈련을 시작한 지 30여 분 만에 호루라기 소리가 운동장을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트랙을 반쯤 돌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드러누운 지 정확히 5초 지나서 악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서 보기만 해도 더운 빨간색 트랙이 내 정수리처럼 뜨겁게 달궈졌을 거라는 생각은 놓친 탓이다.

 

“김민규!”

 

네, 갑니다. 가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거리는 팔뚝과 등판, 종아리 이곳저곳을 손가락을 설설 쓸어내리던 나는 기어가듯 미적미적 걸어 코치님 앞에 섰다. 전국 대회가 코앞이라 점심시간을 알리는 12시 10분에 종이 땡 치면 선배들 틈에 끼어 허겁지겁 밥을 먹고 학교 운동장의 찌그러진 원형 트랙에 갇혀 수십 바퀴를 뛰고, 또 뛰었다. 호랑이처럼 눈을 매섭게 뜬 코치님 때문에 헐레벌떡 뛰어가니 몰아쉬는 숨의 간격이 훅 짧아졌다.

 

봄에는 그나마 견딜 만 하더니 5월 초입부터 몰려온 후덥지근한 공기는 7월 말이 되니 그 정점을 찍었다. 서너 바퀴를 돌면 그제야 숨통이 틀어막히던 게 이제는 한 바퀴만 돌아도 그랬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기만 해도 눈이 부셔 금방 눈을 꾹 감아버리게 하는 태양한테 욕 좀 하다가 코치님이 하는 말의 반절쯤 흘려보내고, 토끼처럼 생긴 구름이 흩어지는 걸 보며 나머지의 반절도 훨훨 날아갔다. 고작 들은 건 15분 쉰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최대한 햇빛을 피해 구령대 아래에 있는 체육 창고에 들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구기고 접었다.

 

“형.”

“왜.”

“원래 짝꿍은 막 다 챙겨주고 그래요?”

 

뭔 개소리야. 아깐 지가 찐만두라고 하질 않나. 너 진짜 더위 먹었지. 원우 형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다 말고 묘하게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확신한 저 눈엔 어쩐지 측은함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눈치도 없이 말을 거는 나에게서 피어오른 짜증도 들어간 것 같았다. 형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됐어요. 퉁명스레 내뱉은 내가 축축한 수건을 목에 두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어대니 건수 잡았다는 듯 킬킬 웃기 시작했다. 아. 그제야 나는 입술을 꾹 말아 숨겼다.

 

“다 챙겨줘서 신경 쓰여?”

“신경 꺼요.”

“맞네. 누군데?”

“아이, 아니라니까.”

 

이놈의 입이 방정이다. 언젠가 한 번 이석민도 그랬던 것 같은데. 너는 입만 안 열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아이씨. 얘는 왜 또 생각나고 난리야. 팔뚝을 쿡쿡 찔러오는 손가락을 뿌리치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천장이 엄청나게 낮아서 고개를 푹 떨구고 허리도 반절로 접어야 했다. 두꺼운 계단을 훌쩍 올라가는데 형이 자꾸 누구냐고 물어와서 나는 듣지 못한 척 체육관을 향해 뛰었다. 장난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할 나를 아주 잘 알아서였다. 더위가 내 멱살이라도 쥐고 사정없이 흔드는지 들이켜는 숨도, 내쉬는 숨도 모두 뜨겁기 그지없었다.

 

“관심 없으면 그렇게 챙겨주지도 않아. 나 봐. 내 짝꿍 이름도 모른다니까?”

“아주 자랑이세요. 얼른 가기나 해요.”

 

코치님한테 혼나면 형이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툴툴대던 나는 뻑뻑한 체육관 문에 손을 올렸다. 기다란 마대나 공을 담아놓는 큰 바구니 같은 것들이 종종 문을 가로막는 일이 있어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고 짜증을 내며 온 힘을 다해 쿵 밀었다. 미는 무게가 다른 때보다 확연히 무거워서 있는 힘껏 힘을 준 게 화근이었다. 문 너머로 으악,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다음엔 뭐가 세게도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그 틈새로 고개만 빼꼼 집어넣었다가 쑥 뺐다.

 

“이런 건 창고에 좀 넣어두라니까….”

 

망했다. 상당히 익숙한 뒤통수가 거기 있었다. 배드민턴 라켓을 쥔 손등이 벌겠다. 다시 조심스레 몸을 들이밀고 앞을 살피니 오른쪽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까졌나? 넘어진 게 공 바구니가 아니라 사람이었고, 그게 하필이면 이석민이라서 나는 뒤에 원우 형이 있는 것도 깜빡한 채로 문을 활짝 열지도 못하고 닫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어떡하지. 도르륵 눈을 굴리며 숨을까, 말까를 고민하는데 뒤에서 확 미는 바람에 떠밀리듯 안으로 넘어지듯 들어갔다. 무릎을 털고 일어서던 이석민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맞닿았다. 젠장. 신이 날 만들 땐 사고 치는 능력 포션을 와르르 쏟아붓기라도 한 모양이다.

 

“…괜찮아?”

 

미안. 앞에 사람 있는 줄 모르고. 덥다고 짜증을 내며 들어오던 원우 형이 대신 사과를 했고 이석민은 얼떨떨한 얼굴로 괜찮아요 대꾸해왔다. 불그스름하게 부어오르는 무릎에 시선이 가서 나는 이를 세워 입술을 짓이겼다. 많이 다쳤어? 그거 하나 물어보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걸 봤는지 형이 팔꿈치로 나를 쳤다. 코치님한테 말해줄 테니까 보건실 데려다주고 오던가. 석민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갔다 와. 괜찮아요.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요. 둘 사이에 끼어 갈팡질팡하던 나는 이를 꽉 물고 석민의 손목을 살그머니 쥐었다.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고갯짓을 했다. 진짜 괜찮은데, 하면서도 졸졸 따라오는 이석민 때문에 나는 보건실로 가는 내내 아무 말도 못 하고 앞만 보고 쿵쿵 걸었다. 심장이 발걸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널을 뛴다. 트랙을 돌 때처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열기가 가득 올라서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진 것 같아서 석민의 손목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규! 김민규! 야!”

“어?”

“좀만 천천히 걸어봐. 너 너무 빨라.”

“어, 어. 많이 다쳤어?”

 

아파? 못 걷겠어? 업어줄까? 너는 픽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피 좀 나는 거 빼고 괜찮아. 너 이렇게 오바하는 거 처음 봐. 내가 무슨 오바를 했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내가 휙 몸을 틀어 석민을 잡아당겼다. 내가 본 이석민은 엄살이 심한데,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떨떠름한 얼굴로 뭐래, 한마디 던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는 이석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근데 민규야.”

“…뭐.”

“너 더워?”

 

왜? 내 물음에 너는 쩔뚝이며 나와 나란히 섰다가 조금 뒤처지기도 하면서 말했다. 아니, 손이 엄청 뜨거워서. 네가 내게 잡힌 손목을 슬쩍 들어 올렸다 내리며 나를 본다. 죄 뚫어볼 것만 같은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나는 더위가 담뿍 묻은 귓바퀴의 골을 문지르기만 했다. 차마 너랑 같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알 듯 말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훈련 끝나서 그래.”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변명뿐이다. 더 크게 뛰는 심장박동이 전실을 쾅쾅 울렸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분다. 손가락 마디 끝마저 쿵쾅쿵쾅 시끄러웠다. 네가 이 박동만큼은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손목을 쥔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

 

 

 

시작이 어땠더라. 그냥, 보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시원하게 정리되지 않은 처음이 답답해도 어쩔 수 없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복 허용 기간이 조금 지나서였나. 잠도 덜 깬 아침이라 대충 걸치기만 한 교복 셔츠 깃을 꾹꾹 내리면서 뒷문으로 들어오는 내게 손짓을 하는 애가 있었다. 짝꿍, 여기야! 하고. 짝이 되기 전까지는, 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애였고, 이름도 몰라서 나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하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몸짓으로 내 자리에 앉았던 것을 기억한다. 당황한 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애는 나를 보고 크게 웃으면서 손때가 묻은 명찰을 보여주었다. 이석민. 혀로 굴려보는 세 글자가 둥글둥글 모난 곳 하나 없었다.

 

“나 너 뛰는 거 봤어.”

 

나는 훈련으로 오후 수업도, 야자도 전부 빠지고 운동장만 지겹도록 뛰었다.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오전 수업만 듣는 나와 끊어질 듯 실처럼 가늘기만 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고 편하다는 걸 알아서 그랬을까. 나와 짝을 하는 애들은 보통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일 하기 바빴다. 이석민만 달랐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고작 4시간 같이 있는 주제에 어제는 이걸 공부했고, 급식으로는 뭐가 나왔는데 맛이 더럽게 없었고, 세계지리 선생은 맨날 자기한테만 질문을 하고, 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하루도 빠짐없이 말을 걸어왔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이석민의 이야기 보따리는 언제쯤 동날까 궁금해서 잠자코 듣기만 했는데 시간이 금방 사라져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진짜 잘 뛰더라.”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순간 이동한 것처럼 반대편으로 슝 사라져있었다며 잔뜩 들떠서 말하던 이석민은 언제부터인가 짝꿍이라는 이유 그거 하나로 제가 보호자라도 되는 양 내 주변을 정신 사납게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책상에 엎어져 눈이라도 감으면 민규야 공부 안 해? 소곤소곤 묻는다던가, 체육 시간에 제 친구들을 다 내버려두고 내게 와서 셔틀콕을 내민다거나, 점심시간만 되면 자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운다거나 하는 귀찮은 일들을 자처했다는 뜻이다. 언젠가 한 번은 야자가 끝나는 시간까지 트랙을 돌다 지쳐서 드러누워 있던 나를 콕콕 찌르더니 온갖 유인물을 내 품에 안겨준 적이 있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놓으면 되는 걸, 급하게 제출해야 하는 안내문도 아니면서. 어두워서 글자가 잘 드러나지도 않는 유인물을 조금은 황당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키니 무리 사이로 섞여든 이석민은 노란색 통학 버스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었던가. 나는 팔을 높이 들어 올려 마구 흔들었다. 이석민이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왜 그럴까. 묘한 불편함은 호기심이 되었고, 관심이 되었다가, 그 관심을 뛰어넘으니 종일 이석민만 생각이 났다.

 

“방학 때도 훈련해?”

“대회 준비해야 하니까.”

“그럼 보충은?”

“당연히 안 하지.”

 

좋겠다. 바닥에 닿지 않고 붕 뜬 이석민의 운동화가 달랑거린다. 흔들흔들 발장난을 치는 이석민이 앉은 의자는 발이 허공을 찰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며 살짝씩 회전했다. 똑바로 앉아봐. 나는 이석민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려 움직임을 멈추고 검지 위로 연고를 쭉 짰다. 체육관 바닥은 미끄러워서 한 번 잘못 쓸리기라도 하면 피부가 쉽게 찢어지고 멍도 심하게 들었다. 딱 이석민처럼. 피가 배어 나오는 살갗에 치덕치덕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손이 달달 떠는 것 같아 억지로 힘을 주었다.

 

“대회는 언제야?”

“다음 주 수요일.”

 

너는 책상에 있는 달력을 보고 날짜를 세더니 툭 말했다. 12일? 얼마 안 남았네. 의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반창고를 서너 개 챙겨 말랑한 손에 올려두었다. 후시딘 같은 거 챙겨 발라. 귀찮은데. 안 그럼 흉져. ...알았어. 가만 보면 이석민은 끄덕이는 고갯짓도 그렇고, 배드민턴 라켓을 쥐고 휘두르는 몸짓도, 복도를 뛰어다니는 움직임도 그렇듯 행동 하나하나가 큼지막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나는 석민이 일어나는 모습을 찬찬히 올려다보다 훅 시선을 떨어뜨렸다. 설마 아직도 얼굴이 시뻘겋진 않겠지.

 

“가자. 수업 다 끝나겠다.”

“괜찮아. 어차피 시험 끝나서 수업 안 해.”

 

쌤은 나 없는 줄도 모를걸. 얼마 안 있으면 방학이잖아. 석민은 큰 반창고로 덮인 상처를 얄따란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아야, 진짜 멍들었나 봐, 했다. 원인 제공자인 나는 괜스레 큼큼 헛기침하며 지저분하게 묻은 연고를 닦아낸 휴지를 반창고 껍질과 함께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이석민과 단둘이 있는 상황은 참으로 불편하다. 왜냐고? 일,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터질 것 같아서. 삼, 얘만 보면 말초신경계인지 뭔지 하여튼 몸 어딘가 고장이 났는지 온몸이 펄펄 끓어서. 사, 나 자신도 무슨 헛말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사실 지금도 발가락 끝에서부터 석민아, 좋아해, 같은 단어들이 무서운 기세로 내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걸 힘겹게 뿌리치는 중이었다.

 

“나 훈련하러 가야 해.”

“매점 가고 싶은데.”

“너 혼자 가던가.”

“다친 사람 놔두고 혼자 가게?”

 

너는 꼭 이렇게 나를 멈칫하게 한다.

 

“같이 안 가줄 거야?”

“코치님한테 혼,”

“아이쿠, 무릎이 너어무 아프네! 멍도 한 달은 갈 것 같은데!”

“아. 알았어. 갈게. 간다고.”

 

그럴 줄 알았어. 실은 너도 매점 가고 싶지? 네가 씩 웃으면서 손을 뻗어온다. 잡아줘. 당연히 내가 해줄 거라고 말하는 눈이 형광등 빛에 부딪혀 반짝였다. 착각했다. 내가 본 게 맞았다. 이석민은 엄살이 심하다. 나는 이석민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한숨을 뱉었다. 아랑곳도 하지 않는 바람에 폭삭 묻혀버렸지만. 아, 이제 더는 네 손목이나 손은 잡고 싶지도 않은데. 너무 뜨겁다고 짜증 내면 어떡해. 맞잡은 손바닥으로 펄떡펄떡 뛰는 내 맥박이 너한테 고스란히 전해지면 어떡하냐고. 안 잡아주고 뭐 해. 나 못 걸어 다니겠어. 물끄러미 내 손과는 판연 다른 얇고 작은 손을 보고만 있다가 나는 등을 돌렸다.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와.

 

“와, 김민규. 존나 치사해.”

“이제 알았냐.”

“진짜 치사해!”

 

응. 나 치사해. 너한테 내 마음 안 들키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파서 못 걷겠다고 엄살을 부리던 이석민은 어디로 갔는지 후다닥 뛰어와 내 옆에 나란히 선 석민이 내가 피할 새도 없이 손목을 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놓여 뻣뻣하게 굳은 몸의 무게중심이 훅 앞으로 쏠렸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무너지기 직전에 다리를 추스르자 비틀거렸던 손목을 더 단단히 붙잡은 이석민이 말간 얼굴로 보건실 바로 옆에 있는 매점 문을 탕 열어 재꼈다. 이 정도면 버릇이지 않을까. (문을 쾅쾅 여는 것 말이다) 손목에 찬 시계가 수업 시간을 반이나 까먹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얼른 가자.”

“괜찮다니까.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고 가자. 응?”

 

이석민이 눈에 들어온 날부터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 공사장 드릴 소리처럼 귓가를 뚫는 맥박 때문에도 그렇지만, 나 못지않게 말릴 틈도 없이 사고를 치고 다녀서 그렇기도 했다. 석민이 없었다면 무겁게 흘렸을 숨을 꾹 삼켰다. 삼킨 건 공기 몇 방울뿐인데 체한 것처럼 속이 따끔거렸다. 어느새 거북알 포장지를 쥐고 꼭지를 문 입술을 둥글게 오므린 이석민의 볼이 홀쭉 들어갔다. 너도 먹을, 으아아, 흘렸어. 나, 휴지, 민규야, 휴지! 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탁자에 있던 휴지를 퍽퍽 뽑아 쥐여줬다.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다. 몸을 흠칫 떨면서 황급히 등 뒤로 손을 숨겼다. 하,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지. 나 먼저 간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쿵 닫힌 문을 열었다. 야아, 어디 가. 같이 가. 아이스크림이 떨어질까 봐 꼭지에서 입술을 떼지 못하는 이석민의 말이 마구 뭉개졌다.

 

“너 자꾸 이러지 마.”

“뭘?”

“그니까… 아, 됐어.”

 

말해봤자 얼기설기 어설프게 엮은 말들로 더 복잡하게 꼬일 게 분명했다. 입술을 비죽대니 동그랗게 뜬 두 눈이 끔벅이며 멀뚱히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석민은 시도 때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내 어딘가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를테면 강아지 같은 저 반질반질한 눈동자라던가, 거북알을 오물대는 입술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로 단단히 무장하고서 간격을 휙 좁혀온다는 말이다. 단단하게 세운 벽이 단번에 허물어졌다. 와르르 무너지는 방법만이 내 유일한 선택지였다. 네가 자꾸 내게 다가오면 나도 괜한 기대를 걸게 된단 말이야.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 너도 나를 좋아해 줬으면, 그런 바람으로 온몸이 부풀어버린다고.

 

 

 

 

***

 

 

 

통 기운이 없다. 엊그제 체육관 문 아래 계단에 폭삭 쭈그리고 앉아 수업시간을 홀랑 다 까먹은 이후로 감기몸살인지 더위를 먹은 건지 재채기가 터지고 코가 막혀 나오는 목소리마저 맹맹했다. 이젠 이석민을 볼 때처럼 온몸에 뜨끈뜨끈 열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바닥을 울리는 발걸음에 슬쩍 고개를 드니 걔다. 이석민. 옆 반에서 체육복 빌려온다고 하더니 어쩐지 그에겐 조금 작아 보이는 체육복을 입고 나타났다. 칠판 왼쪽 아래 구석에 적힌 방학 디데이를 쓱쓱 지우개로 지워내더니 3에서 하나를 뺀 2를 몇 번이고 고쳐 적던 그가 우다다 달려와 자리에 쿵 앉는다. 그 울림이 머리를 하도 세게 쳐내리는 바람에 나는 느릿느릿 팔을 끌어모아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더위로 죽겠더니 오늘은 감기로 죽겠어. 코를 훌쩍거리며 끙끙대는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이름도 모르는 옆 분단 애랑 하하 호호 시끄럽게 떠드는 걸 눈만 데굴데굴 굴려 힐긋거렸다. 짝꿍이 이렇게 아픈데 봐주지도 않네. 김이라도 폴폴 날 것 같은 뜨끈한 콧숨을 흐응 내쉬면서 저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서럽다. 어, 잠깐만.

 

“김민규. 너 또 자? 우리 이제 체육관 내려가야 해. 일어나.”

 

왜?

 

“헐. 야. 너 열 난다.”

 

왜 서럽다고 생각한 거지? 장난이라도 칠 모양이었는지 내 뒷덜미에 손을 턱 얹은 네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낸다. 그리고선 호들갑을 떨며 몸 이곳저곳을 쑤셔대기에 나는 짜증을 가득 담아 팍 몸을 털었다. 내게 닿은 석민의 온도가 후드득 떨어졌다. 탁하기는커녕 마냥 반짝이기만 하는 눈동자가 나를 건드린다. 들이켜려던 숨을 막아내고 울퉁불퉁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만해. 괜찮으니까. 이석민에게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나는 숨을 겨우 들이마셨다.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석민이 툴툴대는 소리마저 저 멀리서 부르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온다. 달뜬 숨을 조용히 삭이고 있으려니 석민은 약은 먹었냐며 내 옆에 턱 달라붙어 물었다.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슬쩍 까딱거렸다. 고갯짓을 알아들었는지 훌쩍 떨어지는 그 온도가 아쉬워서 나는 혀를 내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아내리기만 했다.

 

“민규야.”

 

말없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올려다보자 퍽 당황한 얼굴로 솜털이 오도도 선 볼을 긁적인다. 왜?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누구한테 빌려왔는지 손가락 한마디쯤 짧아서 손목과 팔꿈치 사이에 어중간하게 낀 체육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쭈욱 끌어올린 석민이 나처럼 팔을 괴고 나와 눈높이를 맞춰온다. 시선이 맞닿았다. 이석민. 너는,

 

“보건실 갔다 올래? 내가 쌤한테 말해줄게.”

 

너는 왜 내게 다가오는 걸 멈추지 않는 거야? 소곤소곤 흘러나온 목소리가 천장에 달린 선풍기 바람에 맞고 흩어져 사라진다. 내가 슬쩍 물러서니 이석민은 딱 그만큼 따라왔다.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대화 한 번 오가지 않고 계속 간격을 벌렸다 좁히기만 하다가, 책상 끝에 다다라서 팔꿈치가 쑥 내려앉았다. 하는 수 없이 허리를 곧추세우자 이석민도 똑같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여전히 내게 눈길이 머무른 채로. 나는 이유 모를 간지러움에 휩싸여 느린 몸짓으로 날개뼈 있는 곳을 꾹꾹 문질렀다.

 

“…먼저 가.”

“어?”

“보건실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가라고.”

 

가뭄에 쩍쩍 조각난 땅처럼 갈라지는 목소리가 영 형편없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석민은 뭔가 걸린다는 얼굴로 응, 응, 알았어, 하며 일어섰다. 체육복 바지도 종아리 반쯤에 턱 걸쳐서 불편한지 어기적대던 석민이 평소와 달리 사근사근 문을 닫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다시 책상에 드러누웠다. 아까와는 다르게 팔꿈치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툭 닿아서 뭉그적대며 고개를 들었다.

 

“아….”

 

초코우유다.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초코우유 옆에 뭉텅이로 고이는 것 같았다. 사흘 뒤까지 유통기한인 우유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유통기한이 박힌 검은 활자에 손가락을 올려 물기를 닦아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물건마다 각자의 유통기한이나 유효기간이 있듯이 사람도 누구나 유효기간이 있고, 나는 사랑도 매한가지라고 믿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의 유효기간 또한 어느 사람에겐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이석민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는 그날, 내 감정의 유효기간이 끝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다. 만화나 드라마의 해피엔딩을 보듯 무한정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더욱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이석민이 내 감정을 알아차린다면, 에서 시작하는 명제의 결론은 불안이라는 변수 하나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언제든, 어떤 가설로든, 안 좋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석민이 내게 근접해올 때마다 나는 비상벨을 울렸다. 이 명제가 정말로 실재하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러니 나는 이석민에게 절대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내가 너를 보며 느끼는 감정의 유효기간이 끝나버릴 것을 알아서.

 

우유를 반대로 돌리니 붉은색으로 크게 적힌 로고 밑에 포스트잇으로 김민규 꺼~ 라고 굵은 유성 매직으로 쓴 높낮이 구분 없는 글씨가 남아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이석민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옆엔 정체 모를 동물 비스무리한 것도 그려놨다. 아까 잘 때 써놨나. 내 책상에 올려놓으며 킬킬거렸을 이석민이 생각나 작게 웃었다. 어차피 체육이 육상부 코치를 겸하고 있어 지금 빠져도 훈련 때 말하면 되니 점심시간까지 한숨 자려던 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석민의 흔적이 가득 남은 우유를 보니 체육관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포스트잇만 따로 떼어내 반으로 접어 하복 셔츠 주머니 끝에 손가락이 닿을 정도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사납게 피어오르는 불을 쬐듯 온몸이 뜨거운데도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러다가는 이석민 앞에서 대놓고,

 

“진짜 귀찮아 죽겠…”

“좋아해... 서...”

“네...”

 

좋아한다고 말할 것 같았는데. 이석민의 책상에 초코우유를 내려놓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생각으로만 남겨두려던 걸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버렸다. 좋아해, 라고. 인상을 가득 찡그리며 들어오던 네가 나를 보고 바짝 얼어붙었다. 너와 마주하자 뭔가 걸림돌이 낀 것처럼 사고가 멈췄다가 네가 내쉬는 숨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중간한 온도의 기류가 이상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감기 때문이었는지 그 시끄러운 이석민의 발소리조차 눈치채지 못한 내 탓이었다. 이미 잠긴 앞문 대신 뒷문을 쿵 열고 들어온 이석민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 섰다. 우리는 먼저 다가가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는 그 적정선 사이에 걸친 채로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이석민이었다.

 

“김민규. 방금 뭐라고 했어?”

“…너, 초코우유 좋아한다며.”

 

나 감기 걸려서 우유 못 마실 것 같아서 너 주려고. 마침 네가 들어와서, 큼, 물어본 거야. 허둥지둥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며 둘러댄 변명의 진의를 네가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너는 가면을 덮어쓴 듯 표정 하나 없이 딱딱한 얼굴로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했다.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고.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조금 절박한 마음으로 뒷걸음질 치는 너의 시선을 좇았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여 상상해보기만 하던 명제는 나라는 변수로 결론을 도출하고야 말았다. 아. 너를 붙잡듯 튀어나온 탄식에 문이 쾅 닫혔다. 힘이 탁 풀려 우유를 놓쳤다. 왈칵 흐트러지는 숨을 간당간당 붙잡고 창틀에 몸을 기댔다.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야를 버티지 못하고 손등으로 벅벅 눈가를 닦았다. 온몸에서 열이 났다. 울음을 참으려고 울컥 떠는 입술을 콱 짓씹었다. 유효기간이 끝났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

 

 

 

꼬박 이틀을 앓았다. 코치님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한 감기여서 나는 기숙사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속수무책으로 수마에 삼켜졌다가 뱉어지기만을 반복했더랬다. 그동안 이석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조금 안심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집을 부려 기숙사 바깥으론 절대 나가지 않았다. 공용 냉장고를 열면 원우 형이 학교 앞 편의점에서 사다 준 레토르트 죽과 초코우유가 가득 쌓여있었다. 전자레인지에 3분이면 데워먹는 밍밍하고 맛없는 레토르트 쌀죽은 항상 몇 숟갈 들다 말고 버렸다. 이틀을 내리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해도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초코우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기만 해도 탈이 난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너 이러면 메달 못 딴다.”

 

이틀 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히 나았다. 눈치 없이 빨리 나은 탓에 나는 괜히 내 회복력을 마구 깎아내리고 싶었다. 전국대회가 코앞인 상황에서 이틀을 빠졌으니 하루빨리 컨디션를 끌어올려야 했다. 그래야 메달도 따고 대학도 가고 장학금도 받지. 등 뒤로 묻은 목소리를 떨구지도 못하고 코치님에게 등을 맞아가며 교실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교실에 들어오니 애들 모두가 빗자루나 마대 같은 것들을 들고 있거나 몸을 웅크리고 앉아 열심히 바닥을 긁고 있어서 조금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뭐해? 오늘 방학식이라 청소한대. 아아. 전혀 흥미 없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들려오는 큰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갖다놓을 거야! 지금 간다니까?”

 

너였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반장과 싸우는 너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해 우두망찰 서 있었다. 웬일인지 너는 청소를 도망가지 않고 한 손엔 빗자루를 다른 손엔 구멍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뻥뻥 뚫린 우유 박스를 들었다. 입 대는 부분을 꾹꾹 눌러 접은 빈 우유갑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무겁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멍청한 김민규.

 

“이 우유는 왜 안 버리는 건데? 냄새나잖아.”

“그거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너와 반장 둘 다 내 쪽으로 고개를 휙 튼다. 네 손에 들린 빗자루가 떨어졌다. 반장은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하고 너는 조금은 억울하게, 조금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와 시선을 겹쳤다.

 

“유통기한 지나서,”

“….”

“안 그래도 버릴 거였어. 줘.”

 

반장의 손아귀에 잡힌 빵빵하게 부푼 초코우유를 잡아챈 네가 아무렇지 않게 우유 박스에 던지듯 툭 버렸다. 눈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데 입술과 손이 따로 논다. 나는 이석민의 얼굴 위로 드러난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향하는 석민의 발걸음이 덜컥덜컥 멈춰 나를 돌아보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를 피하는 이석민의 뒷모습에 내 시선을 묻혔다.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고백 아닌 고백을 했던 그 날 내 첫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네가 교실을 쏙 빠져나간다. 그제야 나는 폐 언저리까지 가득 쌓였을 숨을 토해냈다. 아직 감정의 잔재를 채 지워내지 못한, 지독하게 앓은 첫사랑이었다.

iconmonstr-twitter-1-240 (1).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