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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에 기분이 나빴다. 덥다, 진짜 너무 덥다. 나름 17년 살면서 더위 안 탄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개소리였다. 더워도 존나게 더웠다. 이제는 필수가 된 미니 선풍기마저 뜨거운 바람을 내뿜었다. 아, 그냥 지구 망했으면. 등 뒤에 있는 공원에선 매미가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매미 새끼, 존나 시끄럽네. 내가 욕하는 걸 알았는지 더 크게 소리치는 매미였다. 안 그래도 더워서 예민했는데 고막을 괴롭히는 매미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나저나 망할 이석민은 언제 와? 

 “김, 민, 규우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더니 저 멀리서 이석민이 힘겹게 뛰어왔다. 이 더운 날 그늘 한 점 없는 곳에 기다리게 한 이석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흘겼다. 이석민은 그것도 모르고 헤실 헤실 웃으며 물기 많은 요구르트를 나에게 건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차마 뭐라는 못하고 요구르트를 한 번에 원샷 했다. 아, 미지근해. 

 “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 인마." 
 “네가 일찍 왔으면 절을 했어, 인마." 

 내가 내일은 너보다 일찍 온다. 내일을 기대하라며 장담하는 이석민이 웃겼다. 퍽이나.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진짜라며 흥분한 이석민에 알겠다며 대충 대답했다. 내가 들어도 성의 없는 대답에 이석민은 삐진 건지 저 멀리 혼자 걸어갔다. 삐지긴 왜 삐지냐. 이석민- 

 “왜 불러”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얼른 와라.” 

 헐, 형 사랑해! 앞질러 가던 거 다시 돌아와서 안기는 이석민에 덥다며 아무리 밀어내 봤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안 덥냐? 

 “웅, 안 더워.” 

 안 덥다고 할 거면 흐르는 땀이나 닦고 말하던가 뻔뻔하게 땀 흘리면서 안 덥다는 게 어이없었다. 안 떨어지면 아이스크림 없다. 아이스크림 안 사준다는 말에 냉큼 떨어지는 이석민이 약 올랐다. 어휴. 한숨을 푹 쉬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이석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야, 민규야... 

 “왜.” 
 “우리 지각인 거 같은데...?” 

 참고로 지금은 7월이며 방학은 3일 남았었다. 40분까지 교문을 통과해야 했고 지금 시각은 36분이었다. 아, 시발 좆됐는데. 어쩐지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 어떡하지 하면서 머리를 헝크리고 있었는데 이석민이 좋은 생각났다며 나를 불렀다. 

 “그냥 우리 째자!” 
 “... 더위 먹었냐.” 
 “어차피 학교 가도 할 거 없잖아!” 
 “정신 차려라...” 

 역시 좀 그런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석민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얼른 가자, 담임이 지랄한다. 

 

 

<< 삼일 전 시작된 첫사랑 >> 
두 번째 규겸합작 : 나와 우리의 여름 

Copyright 2018. 찬 란. All Rights Reserved. 

 

 

 

 도착하니 교실은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했다. 이제야 살겠네. 뜨거운 바람을 내뿜던 미니 선풍기가 이제는 차가운 바람을 내뿜었다. 민규야, 담임이 너 오라던데. 교무실 가보라는 친구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석민은 먼저 간 건가. 분명 이석민이랑 같이 오라고 했을 텐데 아무리 찾아도 이석민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대체. 뭐, 알아서 가겠지 싶어서 먼저 교무실로 향했다. 가는 김에 얼음이나 얻어먹고 와야지. 

 

 드르륵,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실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나를 감쌌다. 와, 나중에 선생님이나 할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담임이랑 얘기 중인 이석민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딨나 했더니 먼저 간 거였냐. 아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이석민을 찾았던 게 후회됐다. 괜히 돌아다녔네. 

 “석민아. 이젠 어쩔 수 없는 거 너도 알잖아. 네가 싫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야.” 
 “... 네.” 
 “그래, 그럼 들어가고.”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돌아선 이석민과 마주쳤다. 분명 같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해맑았는데 지금은 눈가가 촉촉했다. 이석민은 나와 마주친 게 놀랐는지 두 눈이 커졌지만 이내 날 지나쳐 교무실을 나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건들기만 해도 눈물이 주륵 쏟을 거 같아서 아무 말 못 했다. 우는 건 많이 봤어도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어느 정도 이석민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담임과 짧은 대화를 끝내고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아까 교무실은 조금 추웠는데 교실에 오니 따뜻했다. 이석민 무슨 일 있나. 의자에 털썩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석민과 만나고 나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담임한테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어딘가 심각해 보여서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석민한테 직접 듣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여러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석민이 내 앞에 털썩 앉았다. 뭐 해. 

 “니 생각.” 

 별 뜻 없이 진짜 이석민 생각을 하고 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이석민은 당황한 듯 두 눈이 커졌다. 이럴 땐 토끼 같네. 내심 귀여워서 피식 웃었더니 날 따라 밝게 웃는 이석민이었다. 어떻게 눈이 저렇게 휘지. 이 정도 거리로 오랫동안 쳐다본 게 처음이라 그런가 이석민이 생각보다 예쁘게 생겼다는 걸 느꼈다. 얘 이렇게 생겼었나. 

 

 “민규야.” 
 “응?” 

 오늘 학교 끝나고 나랑 놀자. 언제부터 그런 걸 물었다고 새삼 당황스러웠다. 그러던가. 내 대답에 이석민은 알겠다며 활짝 웃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교무실에서 봤던 그 표정은 어디 가고 지금은 또 괜찮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이석민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티를 안 내니까 모를 수밖에. 아까 교무실에서 안 마주쳤으면 난 이석민이 지금 무슨 일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원래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건 알았는데 막상 진짜로 말을 안 하니 내심 서운했다.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원래 내 성격이라면 무슨 일이냐고 망설임 없이 물었을 텐데 막상 이석민이 저러니 물어보는 게 망설여졌다. 

 “괜찮은 척 존나 잘해, 하여간.” 

 그런 이석민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불쌍했다. 혼자 끙끙 앓고 있을게 뻔한데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 한다는 게. 그리고 서운했다. 내가 그 누구에 포함된다는 게. 이석민은 아무렇지 않게 헤실 거리면서 애들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괜찮아 보이네. 그런 이석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 눈길이 느껴졌는지 이석민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너무 의도적으로 눈빛을 피한 거 같아 다시 이석민을 바라봐야 되나 싶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이석민과 마주치면 안 될 거 같았다. 왜인지 기분이 묘했다. 

 “아, 나 뭐 하냐, 진짜...” 

 

 

 

 


 방학 3일 남은 시점에서 수업시간에 하는 거라곤 영화 보는 것밖에 없었다. 아, 나 이거 봤는데. 저번에 이석민이 하도 보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개봉하자마자 영화관 가서 본 영화였다. 게다가 지금 보는 이유도 이석민이 강력 추천했기 때문인데 이게 그렇게 재밌나. 웬만한 영화는 그럭저럭 보는 탓에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영화였다. 그냥 볼만하네, 딱 이 정도. 근데 이석민은 아니었나 보다. 영화는 그냥 평범한 두 남녀의 첫사랑을 담은 영화였다. 딱히 울거나 감명받을 영화는 아니었는데 이석민은 보고 펑펑 울었다. 공감 된다나, 뭐라나. 원래 눈물이 많은 건 알고 있었는데 그때 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참 많이 우는데, 오늘은 왜 다르다고 느꼈지. 

 “야, 김민규. 이거 기억나?” 

 언제 내 옆자리로 온 건지 귓속말하는 이석민에 깜짝 놀랐다. 응, 니 존나 울었잖아.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는데 이석민은 그만 놀리라며 눈을 흘겼다. 그런 이석민이 웃겨서 조용히 큭큭 거렸는데 반 애들의 귓속에 들어갔는지 조용히 하라는 말이 나왔다. 이석민과 나는 떠들던 것도 그만하고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첫눈에 반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의 눈은 밝게 빛났다. 17년을 살면서 그 흔한 연예인마저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그다지 공감이 가진 않았다. 사랑이라는 건 행복하면서도 힘들고, 희망차면서도 절망적이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되게 역설적이랄까. 

 “난 이 부분이 제일 좋아.” 
  “... 갑자기?” 
  “아무것도 모를 때가 제일 좋다잖아.” 

 이석민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아침에 교무실에서 본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아. 그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벙찐 소리가 났다. 이석민은 나를 보더니 눈웃음 지으면서 웃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활짝 웃은 거처럼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슬퍼 보였다. 아, 진짜 미치겠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당장 물어보고 싶은데 이석민을 보니 정작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못 물어보겠잖아. 망할 이석민아... 

 

 “뭐야, 왜 그래?” 
 “... 아니, 그냥, 그냥.” 

 갑자기 또 괜찮아 보이는 이석민에 당황스러워서 말을 더듬었다. 그런 나를 이석민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영화에 집중했다. 나도 이석민 따라 영화나 봐야겠다 했지만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계속되는 이석민 생각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진짜 이석민 망해라... 

 머리 아파서 그냥 엎드려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다들 어디 갔는지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뭐야, 몇 교신데 다들 없냐. 점심시간인가 싶어서 핸드폰을 보니 이미 다섯시가 넘어간 시간이었다. 미친. 설마 학교 끝난 거야? 분명 잠들기 전에는 삼교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칠교시까지 끝났다는 게 어이없었다. 얼마나 잔 거야, 김민규 이놈아... 

 “일어났어?” 

 왁씨! 언제 들어온 건지 손을 탈탈 털고 있는 이석민에 놀래 이상한 소리가 났다. 와, 존나 놀랬잖아! 내 반응이 웃긴 건지 이석민은 크게 웃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겁은 많아요. 니가 할 말은 아니거든. 나보다 겁 많은 놈이 그러니 어이가 없었다. 

 “그나저나 너 안 가고 뭐 했냐.” 
 “... 오늘 놀자고 했잖아. 그새 까먹냐.” 

 아. 진짜로 까먹고 있었다. 너 신경 쓰느라 까먹었다고 따지고 싶었는데 차마 할 수가 없다는 게 억울했다. 됐다, 내가 말해서 뭐 해. 일단 밖으로 나가려고 가방을 챙겼다. 챙길 것도 없어서 가방이 가벼웠다. 이럴 거면 뭣하러 들고 다니냐는 이석민의 말에 어이없어서 이석민 가방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뭐야, 너 공부하냐? 

 “뭐래. 그냥 가방 자체가 무거운 거야.”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와, 살면서 키 안 큰다고 충고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너 작잖아. 내 말에 진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석민이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웃긴지 나도 모르게 푸흡, 웃음이 샜다. 나 키 178.4센치거든? 소수점까지 밝히며 키 크다는 걸 어필하는 이석민이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내가 조금만 더 클게.” 
 “미친. 욕심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내가 조금만 더 커서 너랑 키 차이 10센치 만들게.” 
 “... 아, 몰라. 밥이나 사줘. 이메다야.” 

 이메다라니. 먼저 반에서 나간 이석민을 급하게 따라나섰다. 근데 벌써 배고파? 내 질문에 점심에 밥 안 먹었다며 멀리서 대답하는 이석민이었다. 왜 밥 안 먹었냐. 나야 자느라 못 먹었다 하더라도 이석민은 왜 안 먹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자는데 어떻게 먹어.” 
 “뭔, 부승관도 있고 서명호도 있는데 왜 못 먹어?” 
 “그게 아니라 너 안 먹고 자는데 내가 어떻게 먹냐.” 

 진짜 미련하게 착했다. 아니, 왜 안 먹어? 진짜 이해가 안 돼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깨우기라도 하던가, 매점 빵을 사 먹던가. 매점 빵은 별로고, 깨우기엔 너가 너무 잘 자고. 꽤나 멀리 떨어진 이석민을 붙잡기 위해 한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이석민을 따라잡았다. 평소에 잘만 먹으면서 뭐가 별로야? 내 말에 이석민은 뒤돌아보면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몰라. 그러니까 나 밥 사줘, 민규야.” 

 아, 짜증 나. 어떻게 웃을 때 눈이 저렇게 접히지. 오늘은 이석민을 보면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교무실에서 이석민과 마주치고 나서.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마음속이 되게 간질거렸다. 무슨 병인가 싶기도 했는데 그냥 기분 탓이라고 넘겼다. 근데 이거 진짜 심각한 거 같은데. 일단 확실한 건 오늘 내 지갑은 털리겠다. 이거 하나밖에 모르겠다. 

 “야, 뭐야. 너 어디 아프냐. 얼굴 존나 빨개.” 

 얼굴이 빨갛다며 내 이마에 손을 짚는 이석민이었다. 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아무리 손을 쳐내봐도 꿋꿋이 손을 떼지 않는 이석민에 점점 더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음,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해맑은 이석민에 어이가 없었다. 됐다, 내가 뭘 바래. 

 “야, 그래도 어디 아프면 그냥 집 가도 돼.” 

 “됐어. 밥 사줄 테니까 메뉴나 골라.” 

 헐, 형아 진짜? 이석민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와 발음이 갑자기 어색했다. 평소라면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거나 싫은 티를 낼 텐데 오늘은 가만히 얼음처럼 굳어있으니 이석민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내 볼을 챱챱 때렸다. 뭐야, 민규야. 너 진짜 아파? 

 “아니야. 오늘 하루 종일 잤는데 뭐가 아파.” 
 “아, 그래도. 너 오늘 이상한 거 같단 말이야.” 
 “아니야. 진짜.” 

 흐음. 이석민은 뭔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이래도 안 피해? 덥기도 엄청 더운 날씨에 이렇게 껴안으면 엄청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지 기대하는 표정의 이석민이었다. 평소라면 밀어낼 텐데 오늘따라 덥든 말든 그닥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진짜. 너 얼굴 또 빨개.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또 빨개졌나 보다. 이석민은 이상하다며 난리를 치는 것도 잠시 다시 한번 나를 안았다. 이석민의 살과 내 살이 끈적였지만 참을만했다. 이석민은 끈적이지도 않은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 김민규 진짜 포근해. 기분 좋다!” 

 이석민한테서 나는 세제 향이 콧속을 괴롭혔다. 기분 좋다며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이석민에 기분이 이상해 바로 떼어냈다. 뭐 하냐, 미친놈아! 아, 기분 좋았는데. 또 해맑게 웃는 이석민에 내 얼굴이 다시 한번 빨개졌다는 게 느껴졌다. 

 “너 웃지 마.” 
 “... 응?” 
 “너 웃지 말라고.” 
 “뭔... 웃을 권리 정도는 줘야지.” 
 “... 안 돼. 내 앞에서 웃지 마, 너.” 

 이석민을 볼 때마다 몸속 어딘가가 간질거렸던 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서 이석민이 떠나지 않던 이유가, 이석민이 웃을 때마다 내 얼굴이 빨개졌던 이유가, 지금 이 기분이 뭔지 알 거 같았다. 

 김민규,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무 충격적인 걸 알아버려서 약속이고 뭐고 집이나 갈까 하다가 이석민 밥은 먹어야겠다 싶어 무작정 고깃집 가서 일단 먹었다. 아무 말 없이 밥이랑 고기만 미친 듯이 먹는 탓에 이석민이 왜 그러냐며 이상한 눈빛으로 봤지만 이석민을 보면 또 기분 이상해질 거 같아서 그냥 무작정 먹었다. 아, 그래도 좀 먹으니까 괜찮네. 

 

 “진짜 사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지랄하지 마. 사달라며.” 
 “농담이었지!” 

 미안한 지 입이 댓 발 나온 이석민이 귀여웠다. 됐어, 인마. 토끼인지 강아지인지 이젠 별게 다 닮아 보였다. 곱슬끼 있는 머리칼을 헝크리자 하지 말라며 소리치는 이석민이었지만 상관 안 했다. 복실복실해. 니가 곱슬의 힘듦을 알아? 몰라, 그런 거. 

 “너 그러다 삼십억 곱슬인한테 욕먹어.” 
 “뭐래. 어디 갈래?” 
 "음, 노래방?" 

 그렇게 우리는 약 두 시간 넘게 노래방에서 놀다 밖으로 나왔다. 노래방에서 이석민 노래 부르는 거 구경하느라 몇 곡 못 불렀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노래방에서만큼은 이석민은 그 누구보다 빛났고 멋있었다. 그런 이석민을 구경하니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거 같았다. 분명 들어오기 전까진 맑았던 거 같은데 나오니 하늘이 우중충했다. 뭐, 더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장마 시작된다는 건 들었는데 오늘부터였나. 아무리 가방을 뒤져봐도 우산은 나오지 않았다. 뭐, 비는 안 오니까 괜찮겠지. 조금 불안했지만 건물 밖으로 나왔다. 더 뭐 할 거 있냐? 내 말에 이석민은 조금 고민하는 거 같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아쉬웠지만 시간도 시간인지라 우린 바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석민 218번 타? 

 “아니, 오늘은 406번 타려고.” 
 “그거 너네 집 안 가잖아. 우리 집 가는데.” 
 “아니야, 다 길이 있어-.” 

 살짝 미소 짓는 이석민이 씁쓸해 보였다. 뭐지, 그냥 웃는 건데 왜 슬퍼 보이냐. 이석민과 노느라 정신없어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이석민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야, 석민-” 
 “406번 왔다!” 

 이제 물어봐도 괜찮겠지 싶어 입을 떼는 순간 406번 버스가 도착했다. 이 순간만큼 버스가 미운 적이 없었다. 아, 지금 딱 그 타이밍이었는데. 이석민은 아예 내 말을 못 들은 건지 가볍게 버스에 올라탔다. 그래, 지금은 괜찮아 보이니까 아무것도 아니겠지. 어딘가 불안했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버스는 아까 미웠던 게 용서가 될 만큼 천국같이 시원했다. 버스 에어컨 냄새 안 좋아하는데 그걸 참을 만큼 버스의 공기는 쾌적했다. 아, 맞아. 민규야 나 할 말 있는데. 시원한 버스의 공기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할 말 있다는 이석민에 설마 하고 이석민을 바라봤다. 

 “사실 이 버스 우리 집이랑 정반대야.” 
 “뭐?” 
 “그래서 너 데려다주려고.” 

 이게 무슨 소리가 싶어 내 귀를 의심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너 그거 설마 말이라고 하냐? 내 말에 이석민은 세상 그 누구보다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ㅎㅎ! 진짜 내가 못 산다. 지금 당장 내려서 반대쪽에서 타라고 하고 싶은데 이미 버스는 꽤나 멀리 와버렸다. 그리고 아까 우중충했던 날씨 때문인지 굵은 빗줄기가 버스 창문에 다닥 다닥 붙었다. 소나기라고 하기엔 거센 빗줄기였기에 금방 그칠 거 같진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려서 당장 다른 버스로 갈아타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 빗줄기를 뚫고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 우리 집 가서 우산 가져가.” 

 이 버스는 처음 타본다고 신기해하더니 이내 잠들었다. 이제 내리는데. 깨우기에는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우기 미안했다. 야, 이석민 일어나 봐. 비몽사몽 일어나는 이석민은 꽤나 귀여웠다. 이젠 진짜 별게 다 귀엽다. 이석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쯤 우린 내렸고 아직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진짜 장만 가보네. 

 “와, 비 많이 와.” 
 “이거 맞고 가다간 감기 걸리겠는데.” 

 우산을 사야 될 거 같아서 가까이 있는 편의점으로 뛰었지만 비가 갑자기 온 탓에 우산은 다 팔렸고 남은 게 없단다. 괜히 왔네. 게다가 안 그래도 거센 비가 더 많이, 더 세게 내렸다. 와, 진짜 좆됐네. 이 비를 어떻게 뚫고 가야 되나 고민하면서 건물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석민이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야, 너 감기 걸려! 

 

 “이거 장맛비라 어차피 안 그쳐. 맞고 가야지, 뭐.” 
 “아니, 그래도...” 
 “죽기야 하겠어? 얼른 가자.” 

 하긴. 어차피 이미 비 맞아 젖기도 했고 집까지 가까웠다. 괜찮겠지, 뭐. 그래도 차마 이석민 감기 걸리는 꼴은 못 볼 거 같아 교복 셔츠를 벗어주었다. 넌 이거라도 쓰고 가. 이석민은 됐다며 거절했지만 무작정 씌어주니 가만히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뭐가.” 
 “같이 써!” 

 아무리 내가 키도 크고 등치가 있다지만 셔츠 한 장에 건장한 남성 둘이 쓰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비는 비대로 오고 셔츠는 있으나 마나 했지만 이석민의 만족하다는 표정에 가만히 있었다. 이것도 괜찮네, 뭐. 무엇보다 내 품에 쏙 들어오는 이석민이 귀여웠다. 다른 사람들은 덩치 크다고 하지만 내 옆에 있으면 작다는 점도 귀여웠다. 그렇게 둘이 순정만화처럼 빗속에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이석민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불렀다. 민규야. 워낙 가까워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코가 닿을 거 같았다. 왜? 굉장히 떨렸지만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도 처음이네. 가까이 보는 이석민은 예뻤다. 

 “나 할 말 있는데.” 
 “응.” 
 “나 유학 가.” 

 

 

 

 

 

 

 

 

 이석민한테 유학 간다는 통보 아닌 소식을 들은 지 삼일이 지났고 오늘은 방학식이다. 아직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이석민은 그날 이후 감기에 걸린 건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망할 이석민. 왜 이제야 얘기하냐고 따지니 말이 안 떨어지더란다. 계속해서 가기 싫다고 부모님을 설득했고, 담임한테까지 부탁해봤는데 부모님의 뜻이 꺾이지 않다고. 빗물이 튀긴 건지 눈물인 건지 알 수 없는 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이석민이 잊혀지지 않았다. 

 - 나 진짜 가기 싫어, 민규야. 이대로 도망치고 싶어. 
 - 아니, 이석민. 진정해. 괜찮아. 
 - 좋아해. 
 - ... 뭐? 
 - ... 좋아해. 

 이 말을 하고 이석민은 어디론가 뛰어갔다. 너무 뜻밖의 말을 들은 탓에 몸이 굳었는지 뛰어가는 이석민을 잡지 못했다는 게 너무 후회됐다. 나도 좋아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틀째 안 오는 이석민이 걱정됐다. 담임도 아무 말 없어서 더 불안했고 이석민은 연락은 커녕 보낸 카톡조차 보지 않았다. 망할 이석민. 그렇게 도망가면 내가 뭐 어떻게 해야 돼? 거센 빗줄기가 조금은 옅어졌다 다시 한번 세게 내렸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최대한 이석민의 유학이 밀어졌으면 했다. 유학을 막지는 못해도 내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야, 이석민 유학 간다는 거 진짜야?” 

 어디서 들은 건지 서명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몰라. 묻지 마, 짜증 나니까. 내 반응을 보던 서명호는 진짜인 걸 알았는데 미친 거 아니냐며 내 책상에 털썩 앉았다. 갑자기 웬 유학이래? 

 “부모님 장기 출장. 두 분 다 가시는 거라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된대. 자기도 가기 싫다고 끝까지 설득해봤는데 걔네 부모님 빡센 거 알잖아. 걔가 별 수 있냐.” 
 “... 어디로 가는데?” 
 “미국인가 호준가.” 
 “존나 광범위하다.” 

 한심하다며 혀를 차는 서명호에 나도 내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망할 김민규. 망할 김민규. 머리를 미친 듯이 헝크리며 자책하고 있었는데 

 “민규야.” 
 “뭐야, 이석민?” 
 “뭐? 이석민?” 

 갑자기 등장한 이석민에 나 포함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이석민으로 향했다. 이석민은 이런 반응이 어색한지 부끄러워하면서 실실 웃었다. 그때 비 맞아서 감기 걸린 건가 얼굴이 좀 빨갰고, 눈이 살짝 풀려있었다. 마음 아프게 왜 또 아프고 난리야. 아프면 쉬기라도 하던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석민은 내 앞으로 왔다. 나랑 얘기 좀 하자, 민규야. 

 “... 아프면 집에서 쉬지, 뭐 하러 왔어.” 
 “너 보려고.” 

 아픈데도 해맑게 웃는 이석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진짜 이석민 못 말린다. 솔직히 말해 만나면 어딘가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색하기는 개뿔, 이석민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빗속에서 들었던 이석민의 고백과 현재 예쁘게 웃고 있는 이석민이 오버랩 되면서 또다시 마음속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처음엔 이 간질거림이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았다. 이게 뭘 뜻하는지 이젠 아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나빴던 이 빗줄기도 이석민과 함께하니 낭만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이석민이 좋았다. 

 “별로 안 됐는데 이제 슬슬 장마가 끝난대.” 
 “이석민.” 
 “한 삼일 남았나.” 
 “석민아.” 
 “삼일 뒤에 나 떠나.” 
 “좋아해.” 

 이석민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이 휘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눈웃음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슬픈지. 삼일 전 시작된,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시작됐을 내 첫사랑이 거세게 내리는 장마와 함께 그렇게 끝이 났다. 

 

 

 이석민의 말대로 장마는 끝났다. 다른 때보다 짧게 끝나서 그런가, 원래라면 조금 서늘했을 시기였는데 장마가 오기 전보다 더 더운 날씨를 유지했다. 그래도 에어컨 바로 밑에서 선풍기 틀고 누워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집 밖에 나가면 바로 지옥인데. 베란다를 통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예뻤다. 햇빛도 쨍하니 더운 것만 아니면 그림이 따로 없었다. 이석민은 출발했으려나. 이석민을 생각하자마자 신기하게도 비행기 한 대가 내 눈앞을 지나갔다. 이석민, 저기에 타고 있으려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도 내 말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석민 안 본지 삼일이 지났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어졌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더니 정말로 내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 그렇게 행복하면서도 슬픈 표정을 짓더니 안된단다. 저 없이 혼자 남은 내가 힘들 거라며 이석민은 내 고백을 받지 않았다. 이게 더 힘든데. 자기 딴엔 배려한 건데 내 입장에선 잔인했다. 
  
 "망할 이석민." 

 그리고 망할 김민규. 이석민은 성인이 되면 한국에 올 거라고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슬픈 표정으로 말하는데 안 기다릴 수가. 어차피 한국에 안 들어온다 해도 기다렸을 나였지만. 아,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갔으려나. 어쨌든 벌써부터 이석민이 보고 싶었다.  

 나의 여름은 너를 사랑하며 시작됐고, 
 너를 기다리며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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