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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는 법

블론(@blerone_17)

두 번째 규겸합작 : 나와 우리의 여름

 

 

 

석민은 오늘따라 복잡한 마음에 한 시간째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맡의 에어컨에선 차가운 바람이 나오고 있었고 오른쪽엔 김민규가 석민 쪽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석민의 자취방에 에어컨이 없는 것부터 시작했다.

 

작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볼 만했지만 하루하루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되는 올해의 여름에는 도무지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끝까지 에어컨 달아주지 않겠다고 버티던 주인아줌마도 올여름에는 결국 항복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에어컨이 들어오기까지의 일주일 남짓은 낮에는 김민규가 일하는 카페에서, 밤에는 김민규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복잡한 마음은 여기부터였다. 여느 때처럼 카운터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온종일 김민규를 구경했다. 주문받는 김민규, 샷 내리는 김민규, 스무디 만드는 김민규. 그런데 오늘따라 내 주변 자리에 손님이 몰려있었고, 그 손님은 모두 김민규를 쳐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손가락질하며 소곤소곤 귓속말도 했다. 그리고 일을 마무리한 후 앞치마를 벗고 내 자리 쪽으로 오던 김민규는 그 손님 중 하나에게 번호를 따였다. 김민규는 흔쾌히 번호를 줬다. 그 모습에 괜히 김민규가 만들어준 청포도 스무디를 빨대로 마구 휘저었다. 테이블에 스무디가 잔뜩 튀었다. 그때부터 기분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괜찮았다. 아니, 괜찮지는 않고 버틸 수는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평소에도 번호 따이는 김민규는 자주 봤었다. 하지만 조금 심통 난 채로 김민규와 한 대화가 석민의 기분을 더 상하게 했다.

 

 

“이번에는 아직 사고 안 쳤냐?”

“응. 아직.”

“…. 그래?”

“응. 이번에는 좀 널널해. 사고 쳐도 지난번처럼 잘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 사장님이 되게 잘해주셔. 나 잘생겨서 손님 많이 늘었대.”

 

 

그때부터 석민의 기분은 저 깊은 지하 벙커 속으로 빠져 도무지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거다. 내가 왜 기분이 나쁘지? 친한 친구가 솔로 탈출의 기회를 잡았는데 그렇다면 축하해주고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 기분은 단지 친한 친구를 잃어서 우울한 게 아니었다. 조금 달랐는데…. 이 느낌은 분명…. 석민은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더 이상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옆자리에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친구를 두고 차마 그 생각까지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근데 내가 진짜로 김민규를…? 그때 갑자기 민규의 손이 불쑥 넘어와 석민의 볼을 감싸 쥐었다. 놀란 석민은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감은 눈 너머로 민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심장 소리가 민규에게 들려 깨어있는 게 들키면 어쩌지 싶었다. 민규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이러다 갑자기 민규가 뽀뽀하면 어떡하지…? 그때는 진짜로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떠버릴지도 몰랐다.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어 조금만 있으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민규는 손을 떼고 자기 자리에 석민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석민은 아쉬웠다. 그리고는 울상을 지었다. 내가 왜 아쉬워하지? 결국 그날 석민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세상이 푸릇푸릇 해졌을 때쯤 겨우 눈을 감았다.

 

석민이 눈을 떴을 때 민규는 이미 출근한 후였다. 석민은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민규의 빈자리만 쳐다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식탁 쪽으로 향했을 때는 다시 또 잔뜩 울상이 됐다. 식탁 위에는 민규의 쪽지가 있었다. 냉장고에 불고기 있으니까 데워 먹고 국도 있으니까 데워먹어. 카페 올 때 조심히 와. 휴대용 선풍기 탁자에 두고 갈게. 결국 석민은 밥도 먹지 못하고 카페도 안 가고 찜통 속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민규는 주문을 받다가도, 음료를 만들다가도 계속 문만 쳐다봤다. 석민이 올 시간이 다 됐는데 영 올 기미가 안 보인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던 어제에 답답하기만 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석민의 표정이 안 좋긴 했다. 계속 뾰로통하고 평소 같았으면 조잘조잘 떠들었을 텐데 어제는 조용했다. 안 오냐고 카톡을 보내도 답장은커녕 계속 읽지도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보고 있을 때도 보고 싶은데 보이질 않으니까 영 일이 집중이 안 됐다. 결국 깨 먹은 유리컵을 치우면서 오늘은 석민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하고 집으로 혼자 걸어가면서 석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요 며칠은 계속 혼자서 퇴근했는데 계속 석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실 옆에 석민이 없으니 잠도 잘 못 잤다. 민규는 석민이 너무 보고 싶었다.

 

 

“여보세요”

“야 이석민. 너 왜 연락 안 해 걱정했잖아”

“네가 왜 내 걱정을 해?”

 

 

민규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연락 좀 안 할 수도 있지. 너 성원이랑 맨날 연락해? 아니잖아. 오버하지마.”

“야 너는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걱정할 수도 있잖아.”

“우리가 그런 사이야?”

“그런 사이는 또 뭐야? 연락 안 되고 그러는데 걱정 좀 할 수 있잖아.”

“야 됐어. 우리 무슨 연애 하냐? 우리끼리 무슨. 이런 거로 싸우지 말자 진짜.”

“뭐?”

 

 

둘 사이에는 민규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민규는 결국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리끼리 무슨? 우리는 안되는 건가? 민규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석민은 민규가 자신의 볼을 감싸 쥐었던 그 날 밤 혼자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마음을 정리하자. 모조리. 싹. 석민은 민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 속의 민규는 다정했지만, 그는 석민 혼자 누렸던 특권은 아니었다. 민규는 주변 사람들을 항상 잘 챙기고 사근사근했다. 그것이 민규의 주변에 항상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민규는 어딜 가나 예쁨 받았다. 그래서 석민은 그 전화를 하면서 거의 울었다. 민규가 전화를 끊자마자 진짜 엉엉 울었다. 석민은 너무 억울했다. 나름대로 정리한다고 민규의 카톡도 보지 않고 아무리 더워도 꾹 참고 찜통 같은 자취방에서 꾸역꾸역 버텼다. 자꾸 민규 얼굴이 머릿속에 동동 떠다니길래 책도 읽어봤고, 영화도 봤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책은 같은 페이지였고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었다. 석민의 몇십 시간의 그 피나는 노력을 민규는 단 한 번의 통화로 모조리 깨부쉈다. 석민은 민규가 너무 다정해서 좋았고, 또 싫었다. 평소에도 함께 다니면서 잊은 과제를 챙겨주는 것, 전기세 내는 날을 말해주는 것, 매일 밥 먹었냐 물어봐 주는 것, 또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면서 일한 지 얼마 안 된 카페에 눈치 없이 죽치고 앉아있는 것, 밤에 그리 넓지 않은 원룸에서 한 이불 덮고 함께 자는 것, 게다가 아르바이트 가느라 바쁜데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내 아침을 챙겨주고 간 것까지. 민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석민을 챙겨줬다. 너는 왜 하필 모두에게 친절해서 계속 나한테도 잘해줘. 그래서 널 좋아하게 됐잖아. 석민은 민규가 너무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몇 번이고 민규를 찾아갈 뻔했던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근데 며칠 만에 하는 전화로 나를 걱정했다고 말하면 어떡해. 석민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겨우 잠잠해졌을 때, 친구들에게서 오늘 술 약속이 있는데 올 거냐는 연락을 받은 석민은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이대로는 또 잠들지 못하고 밤새 김민규 생각만 할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술이라도 마셔서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민이 민규에게 전화했을 때 민규는 막 잘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일단 받아서 사과하기로 했다. 민규는 친구라는 이름까지 잃어서는 안 됐다.

 

 

“여보세요”

“민규야아-.”

“뭐야 너 술 먹었어?”

“민규야아-. 보고싶어엉.”

 

 

석민은 술에 잔뜩 취해서 말끝을 늘이며 얘기했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민규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지갑을 찾았다.

 

 

“얼마나 마셨어? 많이 마셨어? 어디야 지금? 아직 밖이야?”

“히히히 나 길바닥에 있어어-.”

 

 

석민의 말을 듣자마자 민규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정확히 5분 후,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석민의 입에 초코우유를 물리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석민은 손가락으로 민규를 가리키며 빨대를 물어 뭉개진 발음으로 우와- 민규다 민규. 하며 눈웃음을 쳤다. 민규의 거친 숨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때, 민규는 석민을 업어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 석민은 민규의 등에서도 쫑알쫑알 거렸다. 우리 잘생긴 민규. 민규야 너무 보고 싶었어. 내가 좋아하는 우리 민규. 석민은 쉴 새 없이 민규의 목에 볼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민규는 딱 죽을 맛이었다. 날은 또 말도 안 되게 덥지, 땀은 비 오듯 흐르지, 석민은 목덜미에 자꾸 얼굴을 부비작거리지, 거기다가 몸도 흔들어서 자꾸 스르륵 내려갔다. 울상이 된 민규는 아까 3분 만에 주파했던 거리를 한참을 걸려서 걸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몸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사실 좋기도 했다. 석민이 너무 귀여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석민을 내려놓은 민규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석민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계속 민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미간 사이에는 주름이 잡혀있었다. 김민규……. 짜증 나…. 김민규…. 미워…. 잘생겼어……. 김민규 좋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쟤는 30분을 내리 저러네. 부러 삐죽하게 생각하면서도 한껏 솟은 광대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피식피식 웃으며 석민의 옆에 자리 잡았다. 진짜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냐. 슬금슬금 석민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봤다. 속쌍꺼풀이 자리 잡은 동그란 눈, 동그란 코끝, 중얼거리느라 삐죽 나온 입까지. 요 며칠 못 본 동안은 정말 세상에 이석민이 둥둥 떠다녔다. 집 앞 편의점 알바생 얼굴도 이석민, 커피 시키는 손님 얼굴도 이석민, 정말로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이석민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볼 때마다 입 맞추고 싶었던 삐죽 나온 입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민규…. 너 진짜 그러면 안 돼…. 뭘 그러면 안 된다는 건지. 너야말로 이러면 안 돼. 땀 때문에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줬다. 그때 내 볼 왜 쓰다듬었어…. 민규가 순간 굳어버렸다. 아차 싶었다. 그때 안 자고 있었구나. 몸은 굳었는데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 피한 건가? 내가 좋아하는 걸 눈치챈 건가? 머리 쪽으로 열이 확 쏠렸다. 민규야…. 보고 싶어…. 좋아해…. 근데 그러면 나 싫겠지…? 잔뜩 굳었던 얼굴이 점점 풀리고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왔다. 온통 머리로 쏠려있던 몸속 세포 하나하나들이 이번엔 목적지를 심장으로 바꿨다. 아, 얘도 나 좋아하는구나.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새겨넣으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앉아있던 상체가 그대로 석민에게 기울어져 석민을 꽉 끌어안았다. 석민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민규는 석민의 볼을 마구 누르고 주물렀다. 귀여워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좋다고 하고 있다니. 나도 네가 너무너무 심각할 정도로 좋아. 석민아.

 

 

 

석민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너무 익숙한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언제나처럼 부엌에서 내 아침을 차려주는 김민규. 김민규.

 

 

“엥? 김민규?”

 

 

석민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헙! 하고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나온 후였다. 어떡해, 민규 엄청 화가 났겠지? 어제 잔뜩 화내고 전화 끊었는데…. 근데 내가 왜 여기서 눈을 뜬 거지?

 

 

“일어났어? 콩나물국 다 끓였어. 와서 앉아. 잘 잤어? 속 안 쓰려? 물 따라줄까?”

 

 

대체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석민은 어버버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분명히 어제 술 먹으면서 이제 잊고 마음 깨끗이 정리하자! 김민규와는 다시 전과같이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가는 거야. 나만 모르는 척하고, 나만 잊으면 모든 것이 예전과 변함없는 사이가 되는 거야.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근데 그 김민규 집에서 눈을 뜨고, 김민규는 나를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대하고. 너무 비현실적이고 급진한 전개에 요 며칠간은 모두 꿈이었나 생각했다. 식탁에 앉아 밥은 안 먹고 내 얼굴만 보면서 실실 웃는 김민규 얼굴을 보니까 이게 더 꿈인가 싶었다.

 

 

“빨리 먹어봐, 석민아.”

“응….”

 

 

고작 눈 두 개만이 석민을 향해있을 뿐인데 삼백 명 듣는 교양수업에서 혼자 발표했을 때보다 더 따가웠다.

 

 

“맛있어? 간 잘 됐어?”

“응….”

“이거 소시지도 먹어 석민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만 빼꼼 들어 김민규를 쳐다봤는데 눈에서 하트가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지.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 우리는 하나뿐인 친구 사이야.

 

 

“여기 물도 마셔.”

“고마워….”

“밥 다 먹고 후식으로 수박도 먹자.”

“응…. 근데 너도 먹어 민규야….”

 

 

응. 알았어, 석민아. 하트가 나오던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웃더니 드디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석민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근데 석민아 나랑 사귈래?”

 

 

방금 말은 취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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