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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은 이따금씩 매 초여름이 다가오면 우울감이 온몸을 지배하곤 했다. 무더위의 무기력도 아니었고, 1학기를 망쳐버렸다는 후회감도 아니었다. 오히려 석민은 나름 남들과 비슷하게 노력했고 이번 학기는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그렇담 왜 우울해하는가, 그 정체 모를 우울감은 알코올이 들어가자 정체를 드러냈다. 석민은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무어라 웅얼거렸다. 민규는 그 부정확한 발음을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무슨 문장인지 알 수 있었다. 석민은 잔을 놓고 뺨을 테이블에 붙였다. 석민이 초여름마다 우울한 이유는 석민의 엑스-보이프렌드, 즉 H 때문이었다. H는 초여름에 생일이었고, 초여름에 만났으며 한여름에 헤어졌다. H는 석민의 여름을 전부 가져간 것이었다.

 

"야, 그만 마셔."

"나 많이 마시지도 않았어..."

"지금 취했잖아."

 

민규는 석민의 연애사를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었지만, 석민이 술을 마실 때마다 물어보지도 않은 스토리를 줄줄 내뱉었다. 헤어지기 전날까지 다정했던 H는 갑자기 돌연 이별 선언을 했다. 문자 한 줄로 이별을 통보한 H는 그렇게 잠수를 탔다. 번호도 바꾸고, 자취방까지 옮겼다. 석민은 충격이 꽤 컸는지 처음엔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울다가 이젠 술만 마시면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에휴- 민규는 엎드려서 중얼거리는 석민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그런 인간을 만나서- 민규는 석민을 흔들어 깨웠다. 이제 잊어라 좀! 민규는 석민을 보며 간절히 외쳤다.

 

 

 

Love me Love me!

 

 

 

석민이 드디어 H를 서서히 잊혀갈 무렵, 하늘은 석민을 도와주지 않았는지 우연히 석민이 있던 카페에 H가 들어왔다. H는 습관처럼 카페모카에 휘핑크림을 올렸다. 덥다고 나와서 대낮에 커피 한 잔 시켜서 계속 핸드폰만 하다 고개를 올린 게 화근이었다. H는 한 여자와 팔짱을 끼고 석민과 눈이 마주쳤다. 저 미친놈이... 석민은 H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며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석민은 카페 테이블에 엎드려 울면 안 된다고 속으로 되새기며 눈알을 계속 굴렸다. 눈에 힘을 주고 입을 꽉 다물고 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상체를 일으키지 않았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던 민규는 안 그래도 한산한 동네에 손님이 더 없어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점장은 알바생들이 일은 안 하고 딴짓할 것 같다며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고, 이를 모르고 알바에 지원한 민규는 며칠 동안 데이터를 펑펑 쓰다가 데이터 경고 문자가 오고 계산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약 2시간 동안 또 손님이 안 오겠지... 하는 순간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울려 상체를 급히 일으켰다. 눈 주위가 빨개진 석민이 민규의 이름을 부르며 끝을 흐렸다. 석민은 맥주 네 캔을 가져와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너 이거 다 마시게? 아니 너랑 마실 거야. 민규는 바코드를 찍으며 석민을 노려봤다. 띡띡거리는 기계음이 끝나고 민규가 입을 열었다. 나 알바 중이거든? 하지만 그런 민규는 가끔 석민이 놀러 오면 손님이 없다며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며 자주 수다를 떨곤 했다. 그래도 음주는 안 돼. 민규는 석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테이블엔 석민이 다 마신 빈 캔 두 개와 마시고 있는 캔 한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만 원에 네 캔이라 네 캔을 다 샀는데, 혼자 다 마시기엔 배부를 것 같아서 남은 한 캔은 집에 가져가기로 했다. 민규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석민의 얘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인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내 감을 믿어봐. 민규는 울상인 석민에게 핀잔을 주며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 마셨다. 일단 사람이라면 좋아하던 대형견과 민규가 유독 H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이유는 정말로 단순히 느낌이 별로였다. 단지 친한 친구의 애인이라니까 심술이 난 걸 수도 있지만, 항상 민규는 H가 뺀질거리게 생겼다며 아니꼬워했다. 그 '뺀질거리는' H가 민규의 뒤에서 나타나자 석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규는 귀신이라도 봤냐며 뒤를 돌아보자 본인의 입을 막았다. H는 민규에겐 볼 일이 없다는 듯 지나쳐 석민의 앞에 다가섰다.  

 

"석민아, 그게 있잖아."

"..."

 

기어코 내 앞에서 멜로드라마를 찍는구나. 민규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다리를 꼬아앉아 불량하게 둘을 보았다. H는 따끔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갤 돌리자 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입을 뗄 생각 없이 한참을 쳐다보다 답답해진 민규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민규는 H를 좋게 생각한 적이 없어서 말투가 다소 시비적이었다.

 

"뭐 하세요?"

"그쪽은 누구신데요?"

"얘 애인인데요."

 

민규의 폭탄 발언에 석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H는 별 의심 하나 없이 아, 죄송합니다-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민규는 H를 흘겨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석민의 뒤에 선 후 석민의 양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는 의미였다. 석민은 침을 한 번 크게 삼키고 민규를 따라서 들어갔다. 민규는 괜히 과자 코너에 들어가 봉지를 툭툭 건드리다 석민을 붙잡고 몸을 숙였다. 나 완전 멋있었지. 민규는 그렇게 말하곤 꽃받침을 하며 석민에게 물었다. 석민은 민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밀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민규가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석민을 보았다. 하나도 안 멋있었는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민규는 내심 걱정되었다. 아직도 마음이 있는데, 내가 잘라낸 거면 어떡하지? 어두컴컴했던 밤부터 해가 뜨고 알바가 끝날 때까지 석민을 보내고 민규는 의미 없이 포스기에 숫자를 두들기며 생각했다. 민규의 손목엔 어제 석민이 남기고 간 미지근한 맥주 한 캔이 들어있는 봉투가 걸려 있었다. 민규는 캔을 꺼내 마시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미지근해... 민규는 괜히 캔을 땄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민규는 석민이 (순전히 주관적인) 양아치 같은 H를 잊길 바랐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별 후유증을 없애는 데는 바쁘게 사는 게 최고라며 석민에게 학원을 같이 등록하자고 졸랐다. 석민은 처음에 귀찮다며 거절했지만,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제안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민규와 주 5일의 오전 수업을 신청했다.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냐며 석민은 칭얼거렸고 민규는 그런 석민에게 나는 야간 알바니까 조용히 하라며 초코우유를 입에 물렸다.

 

민규와 석민은 강의실 중간보다 조금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열심히 하자며? 석민은 민규의 팔을 툭툭 치면서 흘겨보았다. 민규에게는 이상한 습관 하나가 있었는데, 강의실 뒷자리에서 남들이 공부하는 걸 지켜보면서 자극을 받는 공부법이었다. 난 원래 뒤에서 열심히 해. 그렇게 말하곤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펼친 후 교재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거 올려놓아서 뭐 하게? 석민이 샤프를 가리키고 웃으며 물었다. 난 원래 준비성이 철저해.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펴며 삐진 흉내를 냈다.

 

그런 뒤에 앉는 습관이 발목을 잡아버렸다. 차라리 앞에 앉았더라면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 했을 것이다. 민규는 순간적으로 석민의 눈을 가렸다. 민규가 그토록 싫어했던 H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한 행동 때문에 민규의 필통이 책상에서 떨어졌다. 형형색색의 볼펜과 형광펜들이 바닥에 흩뿌려졌고 강의실 안에 있던 모든 학생의 시선이 민규와 석민에게 향했다. 아 쪽팔려. 석민의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 시선들은 온전히 민규의 몫이었다.

 

"아, 김민규 손!"

"너 그냥 계속 눈 가리고 다녀라. 더 잘생긴 것 같아."

 

민규는 H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반항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해가면서 석민의 눈을 가렸다. 저 인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지? H는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며 주위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민규는 석민의 눈에서 손을 떼어 어떻게 둘러댈지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석민이 민규에게 무어라 따지기 전에 타이밍 좋게 강사가 들어왔다.

 

이 주 정도 공부를 쉬었다가 수업을 들으려니 집중도 안 되었고 미처 커피를 사올 생각을 못 해서 목이 너무 말랐다. 다음엔 수업 전에 커피를 꼭 사 올 거라 다짐하며 석민을 데리고 정수기 앞으로 향했다. 정수기는 강의실에서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자마자 바로 있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정수기 앞엔 사람이 꽤 많았고, 그 무리엔 H도 들어가 있었다. 석민의 눈을 또 가리기엔 석민이 대체 왜 그러냐며 물어볼 것 같았고 그래서 다른 대처법을 써보려고 했지만, 눈동자는 몸보다 빨랐다. 석민이 H를 발견했는지 민규에게 물었다. 야, 저 형이 왜 여기 있어?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별 의미 없는 동정의 표현이었다.

 

민규든 석민이든 둘 다 LC강의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첫날이라 테스트한답시고 문제를 풀라며 음원을 틀어주고 있는데, 가뜩이나 흘려들으면 세 문제를 날려먹는 파트인데, H를 본 뒤로는 집중이 되지 않았다. 민규는 점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알아서 잘 잊던 애한테 괜히 학원에 다니자고 한 게 아닐까. 석민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민규를 데리고 센터로 내려갔다. 강의를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수강 인원 초과로 다른 유명 강사들의 수업으로 옮길 수 없었다. 민규는 그냥 아무 수업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하필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게 뭐람. 민규는 닫힘 버튼을 재빠르게 눌렀지만 H가 열림 버튼을 누른 게 훨씬 빨랐다. 중간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열렸다. H는 민규와 석민을 힐끗 쳐다보았다. 민규는 눈이 마주치자 불현듯 편의점 앞에서 뱉은 거짓말이 생각났다. 민규는 석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H를 노려보았다. H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언제 쳐다봤냐는 듯 꽉 닫힌 문만 응시했다. 민규는 손을 올려 석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민이 뭐 하냐고 물어볼 찰나에 엘리베이터는 9층에 도착했다.  

 

“뭐 해?”

 

석민은 H가 내리는 걸 확인하고 민규를 붙잡고 물었다.

 

“뭐가?”

 

민규는 석민이 뭘 말하는 건지 잠깐 생각했다. 그때 내가 너 애인이라고 거짓말 쳤잖아. 석민은 언제-라고 말하려다가 애매하게 H의 뒷말도 듣지 않고 편의점 매장 안으로 들어갔던 게 생각이 났다. 그거 안 해도 되는데...라고 말하려는 순간 괜히 H에게 반발심이 들었다. 야, 팔짱 끼고 들어가자. 석민은 민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막무가내로 팔짱을 꼈다. 강의실에서 H는 계속 입구를 봤다가 핸드폰을 봤다가 단어장을 보다가 다시 입구를 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H는 누가 봐도 남을 의식하며 어색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어색한 연인 흉내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인기가 많았던 것치고 연애 경험은 굉장히 적은 민규와 거하게 차인 석민의 조합은 처음엔 다소 엉성했다. 잘 걷다가도 학원 근처에서 H를 발견하면 어깨동무를 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이를 꽉 물고 복화술로 왜 밖에서 마주치는 거냐며 서로 투덜댔다. 어깨동무를 하고 머리를 기대고 손을 잡으면서 민규는 석민이 H를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얘기는 들은 기억이 있는데 첫 만남은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았다. 옛날엔 H랑 매일 이랬겠지? 민규는 갑자기 짜증이 확 치솟았다.

 

밖은 폭염이 기승을 부렸고, 학원에 오면서 땀을 다 뺐다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몸이 나른해졌다. 유독 오늘따라 지루했던 수업에 엎드려 곤히 자는 석민이 보였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미동도 없이 자는 석민의 옆에 앉아 피식 웃었다. 어차피 지금 나가봤자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아 늦게 탈 게 뻔했다. 수업을 듣느라 확인 못 한 연락들을 누르며 석민을 더 재웠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밀린 답장을 다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고, 강의실 밖에는 수강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민규는 석민의 등을 흔들어 깨웠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강의실 문 앞에서 H가 삐딱하게 벽에 기대며 서 있었다. 잘 놀라는 둘은 나오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H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H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음 강의 시간은 완전 오후 시간대였고 점심시간이어서 주변이 잠잠했다. H는 벽에서 등을 떼었다. 자세부터 기분 나빠. 민규는 줄곧 안 좋은 인식으로 H를 보았다.

 

"둘이 안 사귀는 거 다 알아요. 연기 그만해도 돼요. 미련 없는데..."

"진짜 사귀는데요."

 

민규는 H의 말을 가로막았다. H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석민아 진짜야? H는 못 믿어서 물어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확신을 가지고 비꼬는 말투와 눈빛이었다. H는 그다지 길진 않았다만 꽤 긴 시간 동안 연인이었던 석민을 잘 알고 있었다. 석민은 거짓말을 잘 치는 편이 아니었단 걸 알고 H는 석민의 표정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석민 제발. 민규는 속으로 석민의 이름과 제발을 수백번 외쳤다. 석민은 대답을 하지 않고 허공에 있는 민규의 손을 찾았다. 이내 곧 석민은 민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진짜야."

 

입술이 닿은 건 처음이라 민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H를 이겼다는 심정보다는 석민의 행동에 기분이 좋았던 게 더 큰 것 같았다. 뒤를 돈 둘은 타이밍 좋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 완전 멋있었지. 석민이 편의점에서의 민규처럼 꽃받침을 하고 물었다. 야, 이거! 민규가 석민의 손 모양을 가리키며 허리를 숙이고 웃기 시작했다. 으이구, 안 멋있네요. 허리를 피자 석민보다 한 뼘 더 커진 민규가 석민의 머리를 헤짚으며 웃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강의는 마침내 종강을 맞이했다. H와 여전히 같은 강의를 들었고 둘을 피하는 눈치였다. 이제 시험만 잘 보면 되는 일이었다. 종강을 한 기념으로 간단하게 학원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역시 종강엔 고기라며 고기에 소주까지 시켜 둘만의 조촐한 종강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시험이 당장 2주 뒤라며 음주를 고민하자 원래 토익은 여러 번 시험을 치고 잘 본 점수 하나 건지는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민규는 H에게 거짓말 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이후 H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그날 이후 민규는 석민에게 가짜 애인 흉내를 내지 않았다. H는 석민의 행동을 보고 진짜 사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규는 줄곧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근데 H는 어떻게 만났어? 석민은 잠깐 회상을 하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둘러댔다. 진짜로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굳이 입 밖으로 꺼내기 싫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민규는 후자라고 생각하며 굳이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직 석민이 H를 완벽하게 잊은 게 아닌 것 같단 짐작을 했다.

 

아까보다 한산해진 번화가를 지나 자취방이 몰린 곳에 도착했다. 방학이다 보니 학생들은 다들 본가로 돌아갔고 더위에 지쳐 에어컨을 틀고 방 안에만 있어서 그런지 길목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숨이 막히는 열대야에 말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올여름은 왜 이렇게 더운지, 밤공기조차 후덥지근했다. 석민은 학원에서 배부한 홍보용 엘홀더로 부채질을 하며 겨우 말을 걸었다. 진짜 덥다. 석민은 갑자기 혼자 걷는 느낌에 뒤를 돌자 민규가 걸음을 멈추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석민은 그런 민규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안 오냐고 재촉하다가 걸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민규에게 다가섰다. 안 오고 뭐 해? 석민이 민규의 팔을 잡자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던 민규가 입을 뗐다.

 

"석민아"

"어?"

"나도 좋아해주면 안 돼?"

 

민규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목소리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난치다 삐졌을 때의 나오던 그 표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석민은 민규가 그냥 한 번 쳐보는 농담인지 아니면 취중진담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주량이 센 민규가 한 병 반 정도를 마시고 술기운이 오를까? 석민은 지난 몇 년간 민규가 한 병 반을 마시고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니고 진짜야."

"거짓말."

"맞아. 거짓말이야."

 

뭐? 황당한 석민이 민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민규는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었고 표정 또한 웃는 낯이 아니었다. 귀여운 강아지 같던 표정은 어디 가고 민규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면서, 마치 진실을 감추기 위해 둘러 대는듯했다. 민규는 석민의 어깨를 잡은 뒤,

 

"믿지 말든가."

 

라고 귓속말을 했다. 열대야 때문인지 숨이 턱 막히고 볼이 달아올랐다. 한여름 밤의 꿈은 아닐지- 석민에게는 또 다른 여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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