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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뜻밖에도 울고 있었고, 나는 마주 울다가 흐려진 눈가로 너를 그렸다. 우리는 아팠다. 나는 열병을 앓았고, 너는 마음을 앓았다. 그렇기에 사랑은 우리에게 병이었다. 우리는 고작 열아홉에 사랑을 앓았다.

 

 

 

 

 

그 해 여름

w.파란

 

첫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석민은 그 말을 원고의 맨 앞에 써넣으면서도 누군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듯한 날선 통증을 느꼈다. 입안이 제법 썼다.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자꾸만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 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 그것이 석민이 내린 첫사랑의 정의였다. 애초에 결말이 정해져있던, 그래서 더욱 속이 쓰렸던. 여름이 오려는지, 열어놓은 창밖으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흩어진다. 여름이 되면 매미가 울고, 매미가 울면……. 옆에 두었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다 식은 채였다.

 

 

 

‘석민아, 대답해.’

 

 

 

날 사랑해? 석민을 재촉하던, 그리하여 결국은 벼랑 끝으로 몰아넣던 날선 목소리. 핏발 선 눈. 세차게 내리던 장맛비. 기억은 뒤엉키고, 석민은 희미한 기억을 덮어두기로 한다. 첫사랑이란 비단 이루어지지 않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첫사랑은 누군가에게는 아물지 않는 흉터처럼,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처럼 남아 당사자를 괴롭힌다. 석민의 열일곱이, 열여덟이, 열아홉이 그랬고 그 해의 여름이 그랬다. 잊고 싶었으나 끝내 잊지 못한 일련의 기억들은 이따금 파도처럼 석민을 덮쳐와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의 끝으로 밀어넣고는 하는 것이었다.

 

 

 

습관처럼 담뱃갑을 찾다가, 곧 얼마 전 금연을 목적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것을 떠올린다. 석민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달큰한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가, 곧 혀가 아릴 정도의 단맛이 휘몰아친다. 코끝에 휘감기는 그 단내를 가만히 맡고 있자면 유난히 선연하게 떠오르는 그 해, 그 여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유독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주던 중저음의 목소리도, 매일매일 수십 번도 더 삼켜야만 했던 뜻 모를 치기어린 고백도, 그리고,

 

 

 

‘김민규.’

 

 

 

저를 무너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그 모나고 각진 이름 석 자도. 전부 잊고 싶어. 그 이름을 떠올린 오늘, 석민은 민규의 꿈을 꿀 것이다. 어차피 그 애가 나올 거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되돌려달라고. 한 발짝 내딛기가 두려워 뒤돌아서 도망쳐버렸던 그 때만큼은 아니기를 바란다고. 석민은 빌었다.

 

 

 

첫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채 아물지 못한 흉터가 되어 가슴 깊숙이 그 어딘가에 자리잡는다. 차마 잊지 못하고 묻어두었던, 그 해 여름처럼.

 

 

 

-

 

 

 

답이 없었다. 원인을 모르니 해결할 수도 없었다. 열일곱의 초여름. 첫사랑이 한창 열병처럼 들끓을 시기였다. 문제집에 답을 끄적거리다가, 슬쩍 곁에 누운 이를 바라본다. 어느새 잠든 민규의 얼굴로 좋은 꿈을 꾸는지 얕은 웃음이 그득하다. 처음에는 내가 얘를? 그 다음에는, 내가 왜 얘를?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을 전부 삼키고 나면 남는 것은 단 하나였다. 결국 끝은 김민규, 하나뿐이었으므로. 16년을 사는 동안 누군가와 사귀어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내가 이성애자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은? 민규를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우정으로 취급받기엔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의 세상은 전과는 180도 달라져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나의 세상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것도, 무너진 것을 쌓아올릴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김민규였다. 열일곱, 이석민의 모든 답은 김민규였다.

 

 

 

또 한 번 고민한다. 왜 좋을까?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다. 좋으니까. 코를 찡긋거리는 그 애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도, 다정한 목소리도, 저를 챙겨주는 행동 하나하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기에 나에게는 민규의 모든 것들이 소중했다. 그래서 덜컥, 제 감정에 이름을 붙여버렸다. 바야흐로 첫사랑이었다.

 

 

 

“…뭐야.”

 

 

 

민규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던 손을 슬쩍 내린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민규가 마른 세수를 한다. 지금 몇 시 됐냐. 민규의 질문에 나는 애써 민규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대답한다. 야자 끝날 시간 다 됐어. 인원체크한대. 민규는 문제집 위에 내 글씨체로 정갈하게 나열된 답들을 찬찬히 훑다가, 대뜸 얘기한다. 너 글씨 되게 예쁘다. 주책맞게 그 말 한 마디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예쁘다는 것도 아니고, 내 글씨가 예쁘다는 건데. 나는 저 한 마디에 왜, 이렇게. 문제집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민규가 기지개를 켠다.

 

 

 

인원체크까지 마치곤 교실을 빠져나왔다. 밤임에도 공기가 조금 뜨거웠다. 나는 새카만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틀어 제 옆에서 발맞추어 걷는 이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본다. 쌍커풀이 짙게 진 코, 입술……. 아,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걸음이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든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거 들키면 진짜 끝인데. 눈을 한 번 깊게 감았다가 뜨는데, 시야 가득 들어차는 게,

 

 

“뭐냐, 너 어디 아파?”

 

 

 

민규의 얼굴. 숨을 흡 들이키고 걸음을 멈춘다. 갑자기 멈춰선 탓에 놀랐는지 민규의 눈이 아까보다 조금 더 동그란 모양새다. 이 순간에도 민규를 귀엽다고 생각한다. 중증이다. 숨이 막히려고 하다가, 크게 내뱉는다. 첫사랑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나만 유난인 건가. 너만 보면 심장이 뛰고, 울컥하고,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가 그래도 너라서 웃음이 나는. 고인 눈물을 닦아낸다. 여전히 놀란 표정의 민규는 말이 없다. 조용히 여름밤 위를 걷다가,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낯설고, 어색해도, 그래도 괜찮아. 너니까.

 

 

 

오늘 밤 꿈에 네가 나왔으면 좋겠어.

 

 

 

-

 

 

 

간밤의 꿈을 되새기지 않으려 노력하던 석민이 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피곤이 극에 달했다. 요 며칠 그놈의 꿈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잔 적이 하루도 없었다. 이런 정신으로 어떻게 인터뷰를 해. 불만이 새어나온다. 택시에서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비트의 옛날 가요가 나온다. 가사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석민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택시가 멈춰서자마자 석민은 요금을 지불하고 빠르게 내려 눈앞의 카페로 들어선다. 아직 안 왔나?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하고 아무 자리에나 앉는다. 핸드폰을 켰더니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이석민 작가님, 저희 측의 실수로 오늘 인터뷰 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사실 누구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늦어지는 건가. 어쩐지 안 좋은 느낌이 들어서, 석민은 조용히 전달받았던 질문지의 내용들을 떠올린다. 날카로운 두통이 점점 더 머리를 죄어오는 기분이다. 아, 원인을 깨닫는다. 아까부터 줄곧 들려오던 매미 소리.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다. 나의 밤에, 나의 낮에, 나의 모든 시간에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남아있던 모든 기억들은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나 있다. 수없이 상상했던 장면. 너를 다시 마주치면 뭐라고 할까. 너 때문에 괴로웠던 밤을 나열하며 원망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나 건네볼까. 상상은 현실의 대체품이 될 수 없다. 만들어두었던 모든 대안들은 실제 상황 앞에서 와르르 무너진다. 내 악몽, 내 원망, 내 청춘, 내 첫사랑.

 

 

 

 

“…이석민?”

 

 

 

 

김민규. 마주친 눈은 더 이상 어리숙하나 다정하던 열아홉의 것이 아니었다. 스물 둘, 석민은 날것의 눈빛을 받아들이기가 괴로워 고개를 숙인다. 추억 대신 악몽으로 남은 기억 속의 네가 악몽에서 걸어나온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김민규는 당황했을 때 주먹을 쥐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석민이 오랜 관찰 끝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꼭 눌러쥔 주먹은 그 때보다 크기도 굵기도 커졌다. 왜, 네가 여기에. 뱉고 싶은 문장은 단어로 분열되어 튀어나온다. 석민은 무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석민은 민규에게 약했다. 그 때와 똑같다. 석민은 한 뼘도 성장하지 못했고, 그래서 늘 알고 싶었던 민규의 진짜 속마음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김민규는 담담한 표정이다. 오랜 친구의 고백에 열을 올리던 소년은 이제 없다. 없어졌다.

 

 

 

“…너는 그때랑 똑같다.”

“너는……, 많이 달라졌네.”

 

 

 

불편한 침묵이 감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나는 왜 이렇게 꼭 김민규 앞에서만……. 괜찮으면, 인터뷰 시작할게. 나는 그 말에 현실을 직감한다. 내 앞에 앉은 것은 열아홉의 김민규가 아니고, 사적으로 만난 관계도 아니다. 옛 기억에 젖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상처는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에게 훨씬 더 오래 가니까. 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다. 동시에 씁쓸해진다. 정말로, 나만 기억하고 있었구나.

 

 

 

-

 

 

 

장마가 오려는지 날이 제법 습했다. 하늘이 잔뜩 흐렸다. 수분을 머금은 공기가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천천히 걷는다. 네 발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속으로 수 천번 되뇌이다가 삼켜버린다. 간밤의 꿈에 네가 나와서 나한테 화를 냈어, 민규야. 좋아하지 말라고, 괜히 고백해서 우리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것이 한낱 꿈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 10분 남았대.”

 

 

 

앉아서 기다리자.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쌓아두었던 말들의 무게가 더해져 지나치게 무거웠다. 딱 한 번만, 한 번은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좋아한다고. 지난밤 꿈처럼 야속하게 화낼라치면, 장난이라고 웃어넘길지라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말하면 안 될까.

 

 

 

“이석민, 버스 왔다.”

“김민규.”

“왜?”

“민규야.”

“무슨 일 있어?”

 

 

 

나는 너무 무서워. 너의 다정함을 잃게 될까봐. 너마저도 잃게 될까봐. 그래도, 사실은 있잖아.

 

 

 

 

“좋아해.”

 

 

 

 

툭, 투둑. 비가 떨어진다. 우리가 타려던 버스는 출발했고, 우린 이 자리에 남았다. 민규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나는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규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아, 명백한 실수였나. 비가 세차게 내렸다. 우산은 없었고, 반짝거리는 전광판에 버스는 다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뒤돌아서 무작정 걸었다. 어깨부터 천천히, 온몸이 젖는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린다. 민규의 시선이 닿은 자리마다 홧홧하게 쓰려왔다. 나는 왜, 너를 좋아해서. 너는 왜. 너는 왜.

 

 

 

“이석민, 다시 말해봐.”

 

 

 

팔을 잡아 돌려세우는 악력. 잠시 숨을 멈춘다. 나는 또 다시 그 애의 감정을 읽을 수 없다. 불인 것 같기도 하고, 얼음인 것 같기도 한 묘한 온도의 시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되묻는다.

 

 

 

“석민아, 대답해.”

 

 

 

나를 사랑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뺨을 감싸는 손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맞부딪치는 입술의 감촉은, 내가 매일 민규를 바라보며 상상했던 것보다도 조금 더 부드럽고 달큰한 향이 났다. 사고가 정지한다. 좋아해? 나를? 너도? 거짓말. 손을 조금 뻗어 네 뒷목을 감싸안는다. 꿈보다도 더 꿈같은 순간이었다.

 

 

 

차라리 그 순간에 멈추었다면 좋았을걸.

 

 

 

 

 

 

 

 

 

“민규가 급하게 전학을 가게 됐다.”

 

 

 

살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은 참 많았다. 그 데일 것만 같았던 키스 이후로 민규는 연락도 없었고, 마주칠 수도 없었다. 빈 옆자리를 바라보다가, 선생님 말을 곱씹다가, 울음을 조용히 삼키다가, 네가 거기 앉아있던 날들을 회상한다. 나 때문일까. 숨을 들이마시면 떠오르는 기억들. 나의 순정은 깨지고 날카로운 파편은 나를 찌른다.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 김민규는 떠났고 내 첫사랑은 끝났구나.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자그마치 1년이 걸렸다. 매일 밤 울다가, 지치면 또 다시 그 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받아들였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마지막 밤 그 키스의 의미는 덮어두기로 했다. 고민해봤자 아픈 것은 나뿐이었으므로.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법을 배웠다.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나의 성격이 되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여전히 김민규라서. 사실은, 어쩌면.

 

 

 

나는 그 애가 나에게 남기고 간 것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

 

 

 

인터뷰가 끝났다. 민규는 무언가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석민을 바라보았다. 석민은 그걸 알고 있었으나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김민규를 버릇처럼 자세하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으므로. 석민아. 김민규는 또 다시 석민을 그렇게 불렀다. 함부로 화조차 낼 수 없도록. 담담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는다.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는다.

 

 

 

“……미안, 난 갈게.”

 

 

 

석민아. 뒤에서 석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처럼 뒤돌아 걷는다. 석민은 여전히 김민규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그의 변명을 듣고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민규는 따라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끝인 거야. 이미 전부 끝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들추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아팠으니까.

 

 

 

때로는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 해 여름의 기억이, 김민규가 그랬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노력해도 여전히 아프게 남은 기억들. 상처는 끝까지 상처로 남는다. 어떻게 해도 과거의 기억은 치유될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르르,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와 안 좋은 기억들을 싣고 지나간다.

 

 

 

또 다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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